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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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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7년04월 / 228
  • 스케치업 5.0을 이용한 3차원 디지털 모델링(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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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7년04월 / 228
  • 뉴질랜드 조경답사기
    조경공사 현장에서 수목조달을 담당하는 분들을 만나보면 요즘처럼 조경수를 구하기 힘든 때가 없다고 한다. 민선자치단체 및 국가정책 등으로 인한 대규모 관공사로 가로수 등 대량수목의 품귀현상 및 설계규격이 하향하고 있고 또한 새로 심기 시작한 수목들은 관리부재로 인해 쓸만한 나무들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 수목구매의 주거래가 조경업체 위주로 이루어졌다면 요즘은 골프장, 건설사, 개인 등 수목구매가 투자대상이 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추세에서 조경시장의 소재개발은 적절한 대안이며, 특히 담당업무를 맡고 있는 소재개발실은 그 역할과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재개발을 위한 선진지 답사라는 목표로 지난 1월에 다녀온 뉴질랜드는 한없이 부러운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갑자기 내린 큰 눈에 많은 걱정을 했지만 일본을 경유, 그 다음날 도착한 뉴질랜드는 한여름이었으며, 건조한 날씨와 이상기후로 인해 여행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뉴질랜드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경관이다. 자연 그대로 보존된 환경은 그 자체로 한 장의 작품사진과 같다. 뉴질랜드는 국립공원이 전국토의 10%를 차지할 정도이며 각종 세계유산은 물론,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강과 아름다운 공원, 고풍스러운 건축물 등 자연의 생동감과 도시적 매력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뉴질랜드의 조경자료가 많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인 것 같다. 누가 굳이 인공적으로 무엇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주변에서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으니까. 뉴질랜드의 공원에는 공통점이 있다. 도심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면적, 수령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아름드리 수목들, 굽이굽이 흐르는 자연형 하천, 드넓은 잔디밭, 어느 곳에서나 접근할 수 있는 담장이 없는 접근로 등등. 크라이스트처치의 해글리공원과 에이번강 - 정원의 도시라고 불리는 크라이스트처치의 도심지도를 보면 절반이 해글리공원이다. 해글리공원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굽이굽이 흐르는 생태형 하천인 에이번강과 거대한 아름드리 수목들, 드넓은 잔디밭이었다. 잔디밭은 각종 공연장 및 골프연습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에이번강은 강폭이 넓지 않고 수심 또한 깊지 않아 물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데, 해글리공원과 에이번강은 이렇게 도심을 흐르는 깨끗한 물, 다양한 수변식물, 주변의 다양한 시설, 또한 동적 활동인 펀팅(Punting- 영국식 뱃놀이) 등 생태관광의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원에는 장미정원, 다층식재구간, 초본류 화단 Herbaceous Border 등으로 구성된 보타닉가든 Botanic Gardens이 있는데, 장미정원에는 카펫같은 양잔디를 밟으면서 운치있는 250여종의 장미를 감상할 수 있다. 다층식재구간은 보행자의 동선을 따라 생단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앞에 계절별초화류를 식재하여 효과를 주고 있다. 초본류화단은 관광성수기인12~2월에 맞춰 다양한 초본류들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또다른 공원의 특징은 보행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의무적으로 가로수를 0.7~2m 정도 가지치기해서 범죄예방 효과를 주도록 하고 내부의 생태공간에는 보행자와 자전거의 출입을 분리, 통제하여 정적인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 / 2007년04월 / 228
  • 힐튼 프라자 웨스트와 오사카 가든시티
    오사카역 주변은 관서 제일의 도시 오사카의 주요 교통 결절점인 동시에 오사카의 현관으로 대표되는 지역으로 오사카역, 오사카 중앙우체국, 힐튼호텔, 리츠칼튼호텔, 하비스프라자, 마이니치 신문사, 다이마루 백화점 등 대규모 빌딩군이 밀집한 오사카의 대표적 비즈니스, 숙박, 상업, 문화 등 복합공간이다. 그 중 힐튼프라자 웨스트는 힐튼호텔이 있는 요시모토 제1빌딩의 반대편에 위치한 요시모토 제2빌딩으로 저층부는 식당가와 명품관, 고층부는 사무실로 이용되는 복합상업건물이다. 또한 바로 인접하여 사계극장과 상업공간으로 구성된 하비스ENT 빌딩과 연결되어 있는 오사카역전의 대표적 업무상업문화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오사카역전 서우메다지구는 문화, 국제, 정보의 도시기능을 강화하고 풍부한 녹지를 확보하여 양호한 도시환경의 정비를 목적으로 1987년 토지소유자들이 중심이 된 오사카가든시티협의회가 조직되어, 지금까지 비즈니스, 숙박, 상업, 문화 등 복합기능을 가진 도시적인 매력이 풍부한 공간을 형성하고 쾌적한 보행공간의 조성에 힘써왔다. 이번호에 소개하는 힐튼 프라자 웨스트는 2004년 10월에 완공된 오사카역전 개발 서(西)우메다지구-오사카 가든 시티의 정면부에 해당하는 가각부 광장이다. 힐튼 프라자 웨스트와 사계극장의 출입구에 위치하는 힐튼 프라자 웨스트 광장은 지하철 요츠바시 우메다역 지하가로와 연결되는 지상, 지하, 그리고 건물의 내부 보이드 void 공간을 연결하는 다공성 多孔性 입체광장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힐튼 프라자 웨스트 가각부 광장은 단편적인 도시의 모습을 하나의 스토리로 연속시키는 일체화된 광장을 위해 도입된 ‘녹綠의 캐스케이드’로 매우 인상적인 공간이다. ‘녹의 캐스케이드’는 독창적으로 고안된 수경시스템으로, 건물의 로비에 지하 2층부터 8층에 이르는 보이드 공간을 만들고 지하 2층부터 지상 1층까지 꽃과 녹지를 도입하였다. 이 공간은 가볍게 떠있는 듯한 녹지의 계단을 실현하여 건물내부와 외부를 입체적으로 상호관입하도록 디자인되었다. 힐튼 웨스트 프라자 광장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지하광장에 부드러운 빛을 제공하는 천공부이다. 지상부에 식재와 함께 설치된 타원형에 가까운 부정형의 천공은 지하철과 연결되는 지하광장에 외부의 산뜻한 빛이 투입되도록 계획되었다. 이 부정형의 형태는 사실 일본인들이 즐겨먹는 주먹밥 형태로 디자이너의 위트를 느낄 수 있으며, 천공부 디자인과 광장 바닥 패턴 등은 녹의 캐스케이드와 통일성을 이루는 형태적 모티브와 재료를 사용하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천공과 녹의 캐스케이드에 의해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상에서도, 지하에서도 상쾌한 식물의 호흡과 부드러운 빛의 확산을 만나게 된다. 또한 일몰 후에는 천공으로부터 도시활동의 빛이 스며들어 독특한 분위기와 경관을 형성한다. 또한 요츠바시 우메다역 지하광장과 힐튼프라자 웨스트 가각부 광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서우메다지구 오사카 가든시티는 연장 600미터, 최대폭원 19미터의 프롬나드 를 조성하여, 녹음이 풍부한 가로공원으로 지구 전체를 연결하고 있다. 서우메다지구는 국철 우메다 화물남측부지를 중심으로 오사카 도심부 중심에 남아있던 미개발지로, 일본국유철도, 한신고속도록 공단, 한신부동산 및 호텔 한신 등 6개의 지권자가 구획정리조합을 설립하고, 이후 개발협의회를 조성하여 재개발지구계획제도를 도입하는 등 체계적인 사업시행을 통해 문화, 국제정보의 도시기능의 강화 및 녹지가 풍부한 도시환경정비를 목표로 오픈스페이스의 확보에 주력, 녹지가 풍부한 가로공간을 조성해오고 있다. 특히, 오사카 가든시티는 오사카가든시티협의회를 구성하여 지구전체의 미래상을 공유하고 협력적이고 순차적인 재개발을 시행하여, 도심부 공간의 재개발에 있어 개별 디벨로퍼 에 의한 난개발이 아닌 조화로운 재개발의 새로운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1992년 마이니치신문사 오사카 본사빌딩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재개발되기 시작하여 10년이 넘는 장기간인데다 지구면적 약 10ha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복잡한 소유관계와 개별적 개발에 의해 지구전체의 난개발 될 수도 있었으나, 풍부한 녹지공간 및 오픈스페이스 확보, 쾌적한 보행자공간의 조성으로 지구전체가 개성을 가지면서도 통일된 디자인을 실현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 2007년04월 / 228
  • 건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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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7년04월 / 228
  • 부끄러운 과거사를 극복하는 반성의 광장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쓰라린 역사의 한 장(章)을 마무리라도 하듯 1989년 독일은 통일된 국가로 재출발했고, 옛 독일 제국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다시 통일 국가의 수도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지난 15년간 전 시가지가 온통 거대한 공사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가는 곳마다 건설 공사가 분망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공사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되리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수도 베를린에서는 새로운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손꼽을 수 있는 건축물은 신축된 수상 관저(首相官邸), 거대한 국회의원 공관, 새롭게 단장한 역사적인 옛 국회의사당, 그리고 소니(Sony) 유럽센터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전쟁의 와중에 크게 파손된 건물 상부 반구(半球) 형태의 천장(Cupola)을 투명한 유리 구조물로 조성함으로써 옛 전통의 아름다움과 오늘날의 첨단 건축 과학 이미지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국회의사당은 단연 ‘명물’로 사랑받고 있다. 그 밖에 베를린에는 새로 조성된 조형물이 또 다른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래는, 그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추모비’여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국인 건축가 피터 아이센먼(Peter Eisenman, 1932~)이 설계한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Denkmal Fue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가 2005년 5월 9일 공식 제막되어 일반에 공개되자 전 세계가 놀라워했다. 그 규모나 형태에서 지금까지 보아온 기념비에 대한 통념적인 틀을 완전히 깨뜨린 조형물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념비 자체가 가지는 예술성에 대한 논란은 물론, 과연 서울광장만 한 규모로 크게 조성해야 했는지, 설치 장소가 꼭 그곳이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일반 시민의 반응이 분분하였다. 여하튼 일반에 공개된 이후 지난 1년간 세계 각처에서 추모비를 찾아온 방문객이 하루 평균 1만 명, 1년에 무려 3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기념비가 갖는 사회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찾아간 추모 기념비는 필자에게 실로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넓은 광장 위에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는 육중한 느낌의 수많은 시멘트 블록들. 높이가 아주 낮고 작은 것부터 3미터가 넘는 육중한 검은 시멘트 블록에 이르기까지, 검은 회색 빛깔을 한 그 거대 집단을 보는 순간 놀라움과 무서운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유대인 캠프 관련 보도 자료에서 가끔 봤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작은 블록들은 어린아이의, 큰 블록들은 어른의 시체를 담은 관(棺)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중한 느낌을 주는 2700개의 검은 회색 시멘트 블록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조용히 명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마치 어디선가 장중한 진혼곡(鎭魂曲, Requiem)이라도 들리는 듯했다. 특히 광장 아래 지하 사료관(史料館)에는 유럽 곳곳에서 자행된 만행을 고발하는 적나라한 각종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자료 중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이 가스실로 끌려가 집단 학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남몰래 알리는 허름한 종이쪽지도 있었다. 그 쪽지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리는 손길과 절규하는 신음 소리가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광장에 즐비하게 서 있는 추모 기념 조형물을 대할 땐 ‘나와 희생 집단’이라는 3인칭 관계에 있었다면, 지하 사료관에서 희생된 가족과 개개인의 고난의 발자취를 더듬을 땐 ‘나와 희생자’, 즉 2인칭 관계로 바뀌면서 더 큰 아픔을 느꼈다. 베를린의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를 제작한 한 작가의 뛰어난 예술적 독창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기념비를 제작 가능케 한 시공주(施工主)의 역할에서 우리는 그 예술성 못지않은 큰마음을 읽을 수 있다. 기자 출신인 레아 로시(Lea Rosh) 여사가 1988년부터 끈질기게 추진해 온 활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독일 사회 전반에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기념비 제작은 가능하지 않았다고 본다. 엄청난 제작비도 그렇지만 독일 국민이라면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스러운 과거사의 한 부분을, 그것도 전쟁이 끝난 지 이미 6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굳이 그렇게 큰 규모로 제작해 아픈 기억을 들추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과 함께 ‘왜 하필이면 새로운 수도의 중심에 설치해야 하는가?’라는 격론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독일 사회는 치욕적인 과거사를 숨기기보다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독일의 미래 세대를 위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성낙 Lee Sung-Nak 가천의과학대학교 총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 2007년04월 /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