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찬 ([email protected])
백두산 정상에는 숲이 없다.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백두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의 공허함에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해발 2천m가 훌쩍 넘는 높은 산으로, 그 정상부는 나무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수목한계선 이후의 지대다. 우리는 이곳을 ‘고산지대alpine zone’라 부른다. 그럼에도 천지의 빙하가 녹아흐르는 차가운 계곡물과 광대하게 펼쳐진 평원 그리고 거친 암석지대는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매년 6월이 되면 이곳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와 수많은 야생화들이 온 산을 뒤덮는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던 황량한 들판은 화사한 색채로 물들어 말 그대로 꽃밭을 이룬다.
백두산 고산지대를 가득 메우는 이 식물들을 ‘고산식물alpine plants’이라고 한다. 고산식물은 기후적으로 한대 북부 및 툰드라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데, 시베리아, 알래스카를 비롯해 히말라야, 알프스, 로키산맥 등이 대표적인 서식처다. 자생종만해도 수만 종에 이르는 광범위한 식물 집단이다. 고산식물은 새로운 소재에 목말라 있는 정원 애호가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식물이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산악지대에 자생하고 있어 희귀할 뿐 아니라 꽃이 크고 아름다우며 독특한 형태미를 지니고 있어 관상 가치가 높다.
하지만 추운 곳에 적응해 살아오던 고산식물에게 난대지역이나 온대지역의 기후는 오히려 혹독하다. 고산식물을 가지고 와서 정원에 심으면 봄철에는 생육이 왕성할지 모르지만, 여름의 무더위와 다습한 장마철 기후는 고산식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아무리 능숙한 정원사라 해도 고산식물을 재배하는 것은 몹시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유럽이나 북미를 여행하면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고산식물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는 약 100여 년 전부터 고산식물이 큰 인기를 얻었는데, 식물원 전문가와 원예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고산지대를 탐험하며 고산의 야생화를 수집·육종·전시해 왔다고 한다.
물론 유럽에서도 초기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러나 꾸준한 관심과 노력으로 고산식물의 생태를 연구·도입하여 저지대에서도 고산식물을 전시할 수 있는 정원 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정원이 바로 암석원rock garden이다. 영국의 위즐리 가든Wisley Garden, 큐 가든Kew Garden, 독일의 베를린-달렘Berlin-Dahlem 식물원, 미국의 뉴욕 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의 암석원은 고산식물을 전시하는 대표적인 암석원으로, 현재까지도 수천 종에 이르는 고산식물이 안정적으로 전시되고 있다.
고산식물의 특징
고산지대의 환경은 혹독하다. 그곳은 1년 중 반 이상이 차디찬 빙설에 덮여 있다. 봄은 저지대에서 여름이 시작되는 6월 말경에야 찾아오고 9월이 되면 다시 겨울이 돌아온다. 식물이 생육할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3개월에 불과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새잎을 내고 광합성을 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으려면 고산식물들은 몹시 분주해진다. 미처 잎을 다 키우기 전에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어린잎들을 얼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종류의 고산식물들은 푸른 잎을 달고 상록성으로 겨울을 버틴다. 상록성 식물들은 봄이 시작되면 새잎을 키우는 준비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광합성을 시작할 수 있다. 대신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잎이 튼튼해야 하므로 표피가 두텁고 큐티클 층이 발달한다. 또 잎이 치밀하고 털이 많이 나있어 기공의 수분증발을 억제하는 특징을 보인다.
또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지면 가까이 낮게 엎드려 자란다. 목본식물의 경우 왜성으로, 최대 1m를 넘기지 않고 대부분 30cm 이내로 자란다. 초본식물은 바닥에 가깝게 바싹 붙어 매트형이나 반구형, 로제트형으로 자란다. 그러나 생육 형태만으로는 극단적으로 낮은 기온에 적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고산식물은 형태와 더불어 식물 조직 내에서 용질의 농도를 증가시켜 겨울철 식물이 얼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절한다. 이러한 현상을 응고점 내림freezing point depression 현상이라 하는데, 이는 순수한 물보다 용질의 농도가 높은 바닷물이 더 낮은 온도에서 어는 현상과 동일하다.
김봉찬은 1965년 태어나, 제주대학교에서 식물생태학을 전공하였다. 제주여미지식물원 식물 과장을 거쳐 평강식물원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식물원 기획, 설계, 시공 및 유지관리와 관련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2007년 조경 업체인 주식회사 더가든을 설립하였다. 생태학을 바탕으로 한 암석원과 고층습원 조성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 이사, 제주도 문화재 전문위원, 제주여미지식물원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조성 사례는 평강식물원 암석원 및 습지원(2003), 제주도 비오토피아 생태공원(2006), 상남수목원 암석원(2009),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원(2010),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암석원(2012) 및 고층습원(201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