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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상을 말하다, 시대를 말하다 조경가 우정상
  • 이필수·안계동·안세헌·배민호
  • 에코스케이프 2016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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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수 _ (주)인토엔지니어링 도시환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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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계동 _ (주)동심원 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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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호 _ 나이스 조경설계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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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헌 _ (주)가원 조경설계사무소 대표

 

지난 4월 22일 조경가 우정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고 우정상 교수를 추모하고, 그가 한국조경설계 분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한 시간이었다. 또한 우정상 교수가 조경설계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인연이 깊은 이필수 소장과 안계동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조경설계업의 뿌리를 찾아보는 소중한 자리가 됐다. 좌담은 우정상 교수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이필수 소장과 조경가 우정상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설계는… 조경공사 수주 위한 서비스

이필수: 우정상 교수는 서인조경의 설립자인데 내가 그와 함께 일을 한 것은 이전에 두 곳이 더 있었다. 제대로 일을 같이 한 것은 1974년도에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부터이고, 그 전에 메디MEDI, Modern Environment Design Institute환경이라는 곳이 있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 계셨던 박기조 교수가 도시계획을 맡고, 우정상 교수가 조경을, 공간에 있던 김한석과 이주호 씨가 건축을 담당해 운현궁 건너편에 있는 제동주유소 4층에 메디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나는 인사하러 갔다가 함께 하게 됐다. 


안세헌: 메디 이전에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있었는가? 


이필수: 그전에는 한국원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파고다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때 멤버가 청주대학교 장태현 교수, 정충식 씨, 송병룡 씨 등이 있었다. 그때는 소위 조경이라는 말도 없었고 원예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휘영 교수를 주축으로 한 주류와는 달리 한쪽에서는 아직 가지를 피지 못한 흐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조경시장이 활발하지 않았으니까 나무를 보급해 주는 사람들이 일을 가져다 주면 그걸 설계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는 조경 일을 하는 회사가 몇 안 됐고, 초기에 계획을 하는 팀으로는 한국원예가 제일 컸다. 


안세헌: 한국종합조경공사 시절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이필수: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시작된 1974년 이전에는 메디라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때 장태현 교수도 같이 했는데, 이 분이 1년 벌어서 한 학기 다니는 식으로, 메디에서 밤샘 일을 하고 등록금을 마련해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사실 도시계획과 출신이라서 박규자 선생을 도와 처음 금오산도립공원 작업을 같이 했다. 이후 1974년에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생겼다. 

이주보 선생이 한국종합조경공사 내부 인테리어를 했다. 나는 그때 대학교 4학년 2학기로 복학할 때인데 내가 한국종합조경공사 현판 글씨를 써서 주었다. 우정상 교수랑 장태현 교수가 먼저 입사하고, 나는 그때 왕래를 했던 장문기 선생 추천을 받아 입사했다. 

이규목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가 당시 설계과장이었고 그 밑에 심우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안동만 서울대학교 교수, 안정희 씨 등이 있었다. 1975년에서 1976년도를 넘어갈 때쯤 우정상 교수는 퇴사하고 서인조경을 설립했다. 당시 회사 일과 논문 쓰는 일을 

병행하면서 내게 도움을 청해 1976년도에 나도 퇴사했다. 


조경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서인조경’ 설립 

안세헌: 우정상 교수와 이필수 소장이 함께 서인조경을 설립한 것인가? 

이필수: 우정상 교수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논문 쓰는 것을 병행하다 보니 힘들어 했다. 메디라는 조직은 와해되면서 박기조 선생은 엔지니어링회사에 들어갔고, 건축을 담당했던 두 사람은 회사를 만들었다. 1977년도쯤 문화재관리국 뒤쪽 1층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서 제도판 6개를 놓고, 작은 응접실 하나를 만들어 서인건축조경을 시작했다. 사무실 이름은 경복궁 서쪽에 있어서 서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 기억한다. 우정상 교수와 내가 조경을 맡고, 이관형 씨가 건축을 맡아 서인조경을 시작하게 됐다. 


안세헌: 제가 기억하기론 서인조경 초창기인 1977년 부터 1980년대 초까지 우정상 교수가 정원 일을 꽤 많이 하셨다. 


이필수: 우정상 교수의 친구들이 다 건축가니까 조경을 하는 우정상 선생한테 의뢰를 많이 했다. 당시 일이 꽤 많았다. 그래서 안계동 소장을 서인으로 데려왔다.

나는 키스트KIST를 갔다가 학교 연구소와 건설회사 등을 거쳐, 우정상 교수 요청으로 다시 서인에서 일을 했다. 그땐 손으로 그려서 작업을 했다. 우정상 교수가 청사진을 뽑아 집에서 그려오면, 그걸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조경의 콘셉트고 뭐고 도면을 예쁘고 섬세하게 잘 그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씩 다 그렸다. 그때쯤 동선도 만들고 기능별로 쪼개는 등의 프로젝트가 서서히 생기던 시절이라 그것을 혼자 다 감당할 수 없었다. 십 여 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다 보니 나 혼자 하기 버거워서 사람을 불러서 같이 했다. 


안계동: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에 있을 때 이필수 선생을 모셨는데, 거기 있을 때 선생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야 안계동이, 내가 먼저 나가서 책상 하나 만들어 놓을 테니까 나중에 그리로 와”였다. 이후 이 선생은 나가시고 나는 코엑스 작업을 하면서 원도시 건축사사무소로 6개월 정도 몸을 옮겼다. 그때 환경계획연구소에 복잡한 문제가 생겼었다. 교수들이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연구원들을 동원하는 관행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원도시 건축사사무소가 환경계획연구소와 계약을 한 것이 아니라 세 명의 교수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했다. 교수들의 개인 아르바이트였던 건데, 교수들이 코엑스 현장에 가서 개인적으로 설계를 하면서 연구원인 내게도 일이 주어졌다. 나는 이 일로 연구소를 그만두고 원도시 건축사사무소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얼마 안 있어 이필수 선생이 연락을 주셨다. 당시 형진에 이사로 계셨는데 서인으로 옮긴 해에 나를 실장으로 영입했다. 


안세헌: 안계동 소장이 서인으로 갈 때 직원 구성은 어땠는가? 


안계동: 그때 허충무, 김승재가 있었고, 이필수 소장과 주로 드로잉에 숙련된 공고 출신 직원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디자이너를 키울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설계는 우정상 교수, 이필수 선생이 하고 배식, 시설물, 내역서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뽑아서 일을 시켰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디자이너로서는 결국 한계가 있었다. 서울공고 출신인 채동철, 박창섭 등이 있었고, 그때 최신현 씨토포스 소장하고 정주현 환경조경발전재단 이사장 등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었다. 나 다음으로 이영종 소장, 최기호 소장, 민영철 소장 등이 있었고, 글씨를 아주 예쁘게 쓰던 양백설이란 친구가 배식도를 거의 다 그렸다. 시설물은 주로 채동철 씨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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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정신, 언제나 새로운 시도 

안세헌: 서인이 1977년도에 만들어졌고 1987년도에 안계동 소장이 합류했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우정상 교수와 단둘이서 작업을 한 것 같다.


이필수: 그렇다. 그때는 나무 심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게 많다. 예를 들면 미끄럼틀 하나를 설계하려면 처음부터 철판 두께를 고민하고 시작했다. 판을 기본으로 그림을 하나하나 다 그리고, 그 다음에 파이프, 녹막이 페인트칠까지 손으로 그리고, 모든 공정의 산출기초를 만들었다. 마감을 몇 번 하고, 기초 계산, 모래와 시멘트의 운반거리 등을 다 따졌다. 그러면 미끄럼틀 하나 설계하는 데 일위대가와 산출기초 작업량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때는 요즘처럼 물가정보 등이 디테일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각각 가게에서 견적을 내야 했다. 설계하는 시간이 이틀이면 내역하고 산출기초 만드는 게 일주일이 걸렸다. 


안세헌: 서인 이후에 서안이라는 설계사무실이 세워졌고, 서인과 서안을 한국 조경설계사무소의 시초로 많은 후배들이 알고 있다. 


안계동: 서인조경 태동기에 서안은 없었고 서안보다 먼저가 한림이다. 한림에 설계사무실이 있었는데 나는 서인을 들어갔다. 당시 한림에 상무로 있던 이재근 씨가 환경계획연구소를 그만두면 데려오려 벼르고 있었는데 서인으로 갔다며 서운해 했다. 그때 박노엽 씨가 한림으로 갔다. 서인이 제일 먼저 생겼고, 그 다음이 한림이었다. 또 아더영이라는 곳이 있었다. 나중에 유중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내가 1981년에 제대하자마자 들어간 게 아더영이었으며, 당시 민간 프로젝트를 주로 했다. 한국종합조경공사는 정부 프로젝트만 하다 보니, 서인이 민간 프로젝트를 많이 한 대표적인 회사라고 볼 수 있다. 


안세헌: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서인조경에서 정원설계를 많이 했다. 그런데 정원설계의 디테일 중에 팔각형 목재 데크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필수: 당시에는 시설물 내역을 하나 만들면 도면 분량이 많이 나왔는데, 하나를 만들어 놓으면 내역쓰기 좋으니까 자주 팔각형 목재 데크를 적용한 점도 있다. 


안세헌: 그 당시 다른 정원들을 보면 시설물이 별로 안 들어가 있는데, 유독 서인조경의 초창기인 1977년부터 1980년대 작업을 보면 그런 디자인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필수: 시도를 많이 했다. 예를 들면 백련산 근처 그랜드호텔 후정에 절벽을 마감하기 위해서 폭포를 만들었다. 지금 같으면 재료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 많이 개발되지 않았던 때인데, FRP로 주물을 떠서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 작업은 내역 만드는 게 보통 일 

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정상 교수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조경식재설계 기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안계동: 장태현 교수와 우정상 교수가 친한 사이였다. 수작업에 일가견이 있던 것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림은 장태현 교수가 더 낫고, 디자인은 우정상 교수가 더 나은 것 같다. 


이필수: 두 분 다 비슷비슷하다. 작업에 있어 우정상 교수가 순발력이 있었고, 장태현 교수는 우 교수보다 더 순진한 성격이었다.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 두 사람은 별동팀이었다. 두 사람이 출장을 가면 열흘에서 보름 만에 나타났는데, 대부분 프로젝트를 현지에서 두 사람이 다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때 우리 설계실에 약 20명 정도 있었는데, 일을 갖고 오면 설계실에 하나씩 나눠주고 웬만한 프로젝트는 하룻밤에 끝냈다. 


안계동: 조경수종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발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용되는 수종은 예전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지피초화류는 늘었지만, 나무 특히 교목류는 많이 줄었다. 원인은 공무원이다. 공무원들이 하자난다고 수종을 다 빼버렸다. “이 나무를 설계에 넣은 거 보니까 아마추어구만” 하면서 식재는 발주 담당이 아는 수종으로 제한됐다. 단풍나무만 해도 지금은 청단풍, 홍단풍, 중국단풍, 기껏해야 복자기 정도만 쓰인다. 예전에는 노무라단풍, 은단풍, 네군도단풍과 전단풍이라고 산단풍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도 사라지고 사멸했다. 침엽수도 지금은 소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주목, 전나무 네 가지 정도만 쓰는데 예전엔 오엽송, 방크스소나무, 선향, 가이즈까향나무, 둥근향나무, 옥향, 독일가문비, 노간주나무, 화백, 실화백, 실편백, 측백나무 등 사용되는 수종이 훨씬 많았다. 하자가 나거나 생산단가가 안 맞으면 업자랑 공무원이 빼 버리고, 흔하고 막 심어도 되는 것만 남겨 놨다. 


이필수: 그 당시 설계는 트레이싱지에 제목, 도면목차를 넣고 세 번째로 나무 그림을 넣었다. 


안세헌: 우정상 교수는 식재설계에 있어 어디까지가 기본계획이고 어디까지가 실시설계인지, 도면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시설물설계는 이런 분류가 됐지만, 식재설계는 단계별 분류가 안 돼서 본인이 학회에 논문도 냈다. 표현기법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걱정을 많이 했다. 조경설계에서 식재가 큰 포지션을 차지하니 이를 단계별로 구분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이필수: 우정상 교수는 나무를 그리고 수종을 쓰고 그 밑에 수형, 뿌리, 단풍색, 이파리 특성 등을 표시해 도면을 발전시켰다. 당시만 해도 나무 하나하나가 생소할 때다. 도면목차가 나오면 도면에 그린 나무의 수형과 특성 등을 써 넣었다. 그 다음에 평면계획으로 넘어가게 했다. 당시 우정상 교수는 그런 걸 잘 그리는 사람을 뽑았다. 요즘은 특기시방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특기시방에도 나무의 수형을 그렸다. 나무가 어느 쪽으로 휘어져 있는지까지 그렸다. 1층 입면에서 보이는 수형들이 어떻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도면에도 안 나오는 것을 특기시방에 러프하게 그림을 그려서 넣었다. 


안세헌: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식재설계 기법은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사회·정리 안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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