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 ; 꽃과 열매의 관상가치가 높은 낙엽활엽관목
우리나라에 앵두나무(Prunus tomentos Thunberg)가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때는 1~2세기경 한사군(漢四郡)이 있었을 무렵으로, 대륙으로부터 중국앵두가 흘러 들어와서 전국에서 재배가 시작되었다. 고려시대에 문헌에 나타난 앵두나무는 중기 8건, 후기에 5건으로 총 13건이 보고되고 있고, 조선시대에는 전기 1건, 중기 3건, 후기 11건으로 총 15건의 기록이 문헌에 나타났는데 과목으로 주로 사용하였다고 보고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세종과 성종은 앵두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성현이 지은「용재총화」에는 효자로 이름난 문종이 세자 시절, 앵두를 좋아하는 자신의 아버지인 세종에게 드리려고 경복궁 안 울타리에 손수 앵두를
심었다고 하고, 성종때는 철정이라는 관리가 앵두를 왕에게 바치니까 이를 갸륵히 여기고 활까지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듯이 왕실에서도 귀하게 대접받는 과일이었던 듯하다. 앵두는 제물(祭物)로도 귀하게 여겨「고려사」에 제사 의식을 기록한‘길례대사’를 보면“, 4월 보름에는 보리와 앵두를 드리고……”라고했다. 또한, 조선에 들어와서 태종 11년(1411)에 임금이 말하기를“종묘에 앵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의례의 본보기로서, 반드시 5월 초하루와 보름제사에 올리게 되어 있다. 만약 초하루 제사에 미처 앵두가 익지 않아 올리지 못했다면, 보름 제사를 기다려서 초하루 제사를 같이 하게 되어 있으니 융통성이 너무 없어 인정에 합하지 못한다. 앵두가 잘 익는 시기는 바로 단오 때이니 이제부터는 앵두가 잘 익는 날을 골라 제물로 바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구애받지 말라”고 했다. 앵두는 흔히 보는 과일 중에서 가장 먼저 익고 맛 또한 달콤하여 조상에 바치는 과일로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경복궁의 함원전 뒤 우물가와 창경궁 경춘전 뒤 화계에 앵두나무가 식재되어 있다.「본초」에 의하면 앵두는 위와 비장을 유익하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하며 설사를 그치게 한다. 일명 함도(含桃)라 하는데, 잎은 뱀에 물린데 찧어 붙이거나 즙을 내어 마시면 뱀독을 푼다. 앵두나무 뿌리를 다려서 즙을 공복에 먹으면 촌충과 회충을 다스리는 약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앵두나무는 추위와 더위에 강하여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정원이나 울타리에 심겨 있으며, 햇빛만 잘 받으면 특별히 가리는 토양이 없으므로 배수가 잘 되는 곳에 심는다. 우리나라 조경 수종의 식재 빈도에서 51~60%정 도로 지역별로는 강원도와 전라북도 지방에 우선 순위로 식재되어 있었다. 주로 과수용으로 재배되었으나 4월에 피는 흰색 꽃과 6월에 구슬같이 달리는 붉은 열매가 아름다워 화단의 액센트 식재로 적합하다. 또한 열매는 젤리와 주스로 만들어서 식용하기 때문에 식재 분포가 넓다. 또한 새들이 앵두 열매를 매우 좋아해서 앵두나무를 식재한 경우에는 새를 방어하기 위해서 그물을 설치해서 열매를 보호해 줄 필요가 있다. 경계식재 혹은 군식용으로 사용하고 대부분의 육묘장에서는 실생묘를 판매하고 있다. 앵두나무의 조경수 판매 현황을 살펴보면 정부고시 가격에는 없고, 조경수협회가격에서는 판매가격이 1987년에는 17,333원에서 매년 4.1% 증가되어 2002년에는 H1.5×W0.8 정도의 것이 23,500원에 거래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현재 성상별 조경수목 사용 빈도 순위별 사용현황에서 낙엽관목류 총 66종 중에서 49위를 나타내고 있으며 수고의 크기는 1.5~2.5m정도의 나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지금까지 앵두나무는 거의 관상용 내지 자가생식용으로 심겨져 있는 정도였고, 현재 충남 논산시 연무읍 주변 지역은 12ha 정도의 재배면적을 갖는 중요 주산지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정원용, 분재용으로의 재배규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키워드: 앵두나무, 하유미, 흰앵두나무
※ 페이지: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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