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광표 ([email protected])
작정 배경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1192~1338년)는 건구建久 3년(1192년)부터 연원延元 3년(1338년)까지의 시간적 범위를 가진다(西桂, 2005, p.60). 건구 3년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1147~1199년)가 가마쿠라 막부幕府{를 개설하고(1185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취임한 해이며, 연원 3년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고묘光明 천황을 옹립하고 정이대장군에 임명된 해다.
가마쿠라의 땅에 무사정권이 존재했던 가마쿠라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된다. 그중 하나는 헤이안시대의 공가문화公家文化에 대응한 무가武家문화의 형성과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신불교新佛敎 문화의 도입과 발전이다(西桂, 2005, p.60). 신불교 가운데에서도 선불교禪佛敎는 무사들의 정서와 쉽게 친화되는 현상을 보이며 크게 부흥하였다.
가마쿠라시대가 열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가마쿠라막부는 여전히 헤이안시대의 전통적인 공가문화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일정 기간 동안 교토중심적 문화 양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쿠라시대의 전형적인 문화적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무사들의 솔직담백하고 강건한 성향이 만들어낸, 서민적이고 현실적이며 창조적인 가마쿠라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공가문화에 대응하는 무가문화라 할 수 있다. 이에 교토와 가마쿠라는 이원적 문화 구조를 보이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이 점차 일반화되면서 가마쿠라문화가 정착·발전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볼 때 가마쿠라의 문화는 전통적인 공가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가 융합된, 반 보수, 반 혁신적 문화 형태라 할 수 있겠다.
가마쿠라시대가 열리면서 불가佛家에서는 새로운 불교적 사상을 추구했다. 불교가 도입된 이래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귀족불교적 성향과 헤이안시대 말기부터 계속된 말법적인 세속화 현상에 반발하여, 새로운 불교를 지향한 무가들의 노력과 더불어 당시 중국 송나라에서 유행하던 불교적 성향이 도입된 결과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가마쿠라시대에 나타난 신불교는 호넨法然(1133~1212년)의 정토종淨土宗, 신란新鸞(1173~1262년)의 정토진종淨土眞宗, 니치렌日蓮(1222~1282년)의 일련종日蓮宗, 에이사이榮西(1141~1215년)의 임제선종臨濟禪宗, 도겐道元(1200~1253년)의 조동선종曹洞禪宗 등이다. 호넨의 정토종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구제받을 수 있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 신앙을 기초로 한다. 또 호넨의 제자인 신란은 호넨의 정토종이 전수염불 외에 는 인정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준다며, 구원은 절대적으로 부처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절대 타력’의 신앙을 주장하여 정토진종을 창종했다. 법화종의 종조인 니치렌은 ‘창제성불唱題成佛’을 설했는데, 이는 『묘법연화경』의 제목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니치렌은 “염불을 외우면 무간지옥으로 떨어진다念佛無間. 선을 수행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禪天魔. 진언을 외우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짓이다眞言亡國. 율법을 강조하는 것은 도적들의 헛소리다律國賊”라는 네 가지 격언을 입에 달고 다니며, 다른 종파를 매도했다.
에이사이와 도겐이 주창한 불교는 선종에 기초한 것이었다. 선종은 당시 중국송나라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경전도 필요 없이 오로지 좌선만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수행법을 근간으로 삼는 새로운 불교였다. 이러한 선불교 정신은 당시 무사들의 정신세계와 잘 맞아 떨어져 결국 가마쿠라시대에 새롭게 형성되고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에이사이는 1168년 중국에 건너가서 조겐重源을 만나 천태산과 육왕산을 순례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선과 밀교를 공부하였으며, 1187년 다시 중국에 건너가 회창懷敞 선사에게서 임제종을 배우고 귀국하여 일본에 전했다. 임제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 하면서, 좌선을 통해 스승에게서 받은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것을 중시했다. 1199년 에이사이는 가마쿠라막부의 초대를 받아 가마쿠라로 진출하면서 막부의 실력자들과 교류하게 됐다. 당시 귀족 불교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던 무사들은 선종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가마쿠라막부는 급기야 교토에 겐닌지建仁寺, 가마쿠라에 주후쿠지壽福寺를 건립하고 에이사이를 주석하도록 하여 선종이 유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도겐은 에이사이의 제자인 묘젠明全에게 선을 배웠으나 답을 얻지 못하고, 1223년 중국으로 건너가 각지의 선원을 전전하며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선의 진리가 철저한 자력본원自力本{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겐은 천동산의 여정如淨 선사에게 조동선을 배우게 됐는데, 조동선은 묵조선 默照禪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스승이 낸 문제를 해결하는 임제선과는 달리 오로지 좌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수행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도겐은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했고, 이에 일본에서도 순수한 선종이 뿌리내리게 된다(구태훈, 2011, pp.202~216).
이러한 문화적 성향과 신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가마쿠라시대의 건축과 조경에서는 고대의 건축술이나 작정술과는 다른 양식이 나타나게 된다. 가마쿠라에 지어진 무사들의 주택은 처음엔 헤이안시대의 전통에 따라 침전조 양식을 보였으나, 무사들의 생활 자체가 교토의 귀족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차츰 실생활에 맞는 소규모로 지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원 또한 작은 규모로 만들어졌다. 무사의 주택과 정원은 두루마리 그림에 그려진 것이 전해지고 있는데(한국전통조경학회, 2009, p.484), 이것을 보면 두 가지 유형의 정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법연상인회전法然上人繪傳”에 그려져 있는 미마사카노쿠니美作國의 무사주택에는 배후의 산과 더불어 전면에 논이 펼쳐져 있다. 산으로부터 끌어온 물은 관개용수로 이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주택 남쪽의 평정平庭에는 입석이나 식물이 없어, 감상을 위한 정원 요소가 특별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주택 내의 식재는 집 뒤편에 있는 죽림이 전부다. 또한 “남금삼랑회사南衾三郞繪詞”에 그려진 요시미지로吉見二郞의 주택을 보면, 웅장한 주택 내에 못이 있고 그 위엔 배가 떠있으며, 못에 면하여 조전釣殿이 있다. 정원에는 홍매, 벚나무, 소나무와 같은 정원수가 식재되어 있다. 이에 요시미지로의 주택은 침전조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만 문과 담 등에 방어를 위한 조치가 엄중히 되어있다는 것이 헤이안시대의 저택과 다른 점이다.
요후쿠지 정원
가마쿠라 시의 요후쿠지永福寺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창건한 3대 사찰1 가운데 하나다. 요리토모는 히라이즈미平泉 전투에서 개선凱旋한 후 전쟁에서 희생된 ‘수만의 원령怨靈’들의 혼을 달래기鎭魂위해 이 사찰을 만들었다. 죽은 이들이 극락왕생하도록 아미타여래상을 모신 아미타당을 건립하고 전면에 못을 만들었는데, 정토정원을 만들고자 의도한 것이다. 『오처경吾妻鏡』에는 요리토모가 히라이즈미 평정 때 주손지中尊寺, 모쓰지毛越寺, 무량광원無量光院, 관자재왕원觀自在王院 같은 대찰들을 순견巡見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미루어볼 때 요후쿠지는 요리토모가 히라이즈미 평정 때 본 여러 사찰들의 양식을 원형으로 삼아 조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후쿠지의 본당인 이계당二階堂을 2층으로 지어 히라이즈미 주손지의 대장수원大長壽院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나, 모쓰지의 대천지大泉池를 인용해 전면에 큰 못을 둔 정토정원을 만든 것을 보면 확연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처경』에는 여러 기사들이 실려있어, 이를 통해 요후쿠지는 처음부터 전형적인 정토정원으로 의도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 현재는 한국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전통조경』, 『한국의 전통수경관』, 『정원답사수첩』 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