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광표 ([email protected])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년)는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1305~1358년)가 고묘光明 천황을 옹립하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이하 쇼군)에 임명된 연원延元 3년(1338년)부터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하는 원구元龜 4년(1573년)1까지, 235년의 시간적 범위를 가진다. 이 시대는 정원 문화사로 볼 때 황금기를 이룬 시대 중 하나로 일본 정원의 독특한 양식이 성립된 시기였다.
일본 역사상 무로마치 시대는 3단계로 구분된다. 초기는 남북조가 통일되는 원중元中 9년(1392년)까지이며, 이 시기를 ‘남북조시대’라고도 한다. 남북조시대는 헤이안 시대의 공가公家 문화와 무로마치 시대의 무가武家 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무로마치 문화가 형성되는 시기다. 중기는 원중 9년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메이오明応 원년(1492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는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1358~1408년)의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36~1490년)의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가 결합되어 형성되는 무로마치 문화의 융성기다. 말기는 호소카와마사모토細川政元가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쫓아내고 요시즈미義澄를 황제로 옹립한 메이오 2년부터 무로마치막부가 막을 내리는 원구 4년까지를 말하는데, 이때를 전국시대라고 이른다.
전국시대는 오닌應仁 원년(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닌의 난은 8대 쇼군인 요시마사의 후계자 내정을 둘러싸고 슈고다이묘守護大名2들의 대립이 얽히면서 11년간이나 지속된 내란이다. 요시마사는 자식이 없자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를 후계자로 정하고 관령인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를 후견자로 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정실부인인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로부터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尙가 태어나면서, 히노 도미코가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을 후견자로 삼았다. 결국 양측이 충돌하여 오닌의 난이 시작되었으나,3양군의 수뇌 즉,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서군의 야마나 소젠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1477년 난은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이 전쟁 탓에 교토는 황폐해지고,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적인 정권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쇼군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과 더불어 지방에서는, 슈고다이묘들이 그들의 영지를 지방에서 대신 다스려온 슈고다이守護代 등의 유력 가신들에게 지위를 빼앗기기도 하고, 슈고다이는 다시 고쿠진國人이라 불리던 토호에게 세력을 넘겨주게 되면서, 무가 사회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넘보는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했다. 이러한 풍조가 사회 각계각층에 미치게 되면서, 이후 전국시대라고 하는 1세기 간의 혼돈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정혜선, 2011).
무로마치 시대 초기(1338~1392년)의 정원
전국적으로 내란에 휩싸인 남북조시대는 무가 세력이 공가 세력을 압도하는 한편으로 민중세력이 형성되는 시대적 특성을 가진다. 가마쿠라 시대에 임제종은 가마쿠라 호조씨北条氏와 깊이 연계되어 발전했으나,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와서도 막부로부터 두터운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무로마치 시대의 정원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작용 인자가 된다.
교토에 막부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헤이안 시대의 공가 문화를 동경했다. 이것은 옛 그림古繪圖과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니조성二條城과 산조보몬三條坊門4 그리고 손자인 3대 쇼군 요시미쓰에 의해서 복원된 무로마치도노室町殿5 등에서 볼 수 있는 침전조의 건물과 정원이 쇼군 다카우지가 가졌던 삶의 단면을 살필 수 있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생전에 3개, 사후 4개의 국사國師 호를 받아 칠조제사七朝帝師로 존숭되었던(枡野俊明, 2008, pp.220~221) 무소 소세키夢窓疎石(1275~1351년)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直義 형제의 청에 따라, 전쟁에서 죽은 적과 아군 모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안국사安國寺를 전국 곳곳에 창건하고 이생탑利生塔을 건립했다. 또한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텐류지天龍寺를 창건하기도 한다. 무소 소세키가 가마쿠라 시대를 거쳐 무로마치 시대에 작정한 선찰禪刹의 정원은 정토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그의 작풍作風은 그 시대 정원 문화의 형성에 있어 실로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소 소세키는 불교적 측면에서 볼 때 선의 일본화를 추진한 장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원을 작정함에 있어서는 선과 정원 문화를 상호 관련지어 놓았다는 측면으로 기억된다. 그를 두고 ‘煙霞(庭園)の癖あり’라 일컫는 것을 보면, 그가 정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소 소세키가 작정한 정원 가운데에서도, 역응曆応 2년(1339년) 사이호지西芳寺에 주석하면서 수정·복원한 정원은 무소 이후 일본의 선정禪庭을 만드는 데 있어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특히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기타야마덴北山殿6 정원이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히가시야마도노東山殿7 정원의 조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西桂, 2005, pp.70~71).
무소 소세키에 의해 조성된 텐류지 정원의 용문폭龍門瀑과 지중입석池中立石, 삼교석조三橋石組 등과 같은 요소들은 그때까지 유행했던 침전조 정원이나 정토 정원 같이 의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공간의 디자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무소 소세키가 창안한 수묵화 같고 상징적인 의장을 가진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등장하게 되는데, 이 같은 작정 기법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 출현하는 본격적인 가레산스이枯山水(물을 사용하지 않고 지형으로만 산수를 표현한 정원)양식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무소 소세키와 아시카가 타다요시와의 문답을 적은 『몽중문답집夢中問答集』 제57항 ‘불법佛法과 세법世法’에서 무소는 정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허식과 외견을 중시하는 세속의 먼지가 가득 쌓인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정원에 마음을 빼앗긴 풍류인이며, 나머지는 구도의 마음을 가지고 자연을 경영하려는 사람이다.” 정원을 좋아하는 가장 높은 경지는 구도의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다음의 게송(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미하는 노래)에서는 무소소세키의 자연관이 한마디로 드러난다.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정히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좋다고도 할 수 없다. 산수에는 득실이 없고, 득실은 사람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 현재는 한국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전통조경』, 『한국의 전통수경관』, 『정원답사수첩』 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