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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도시 문법, 조경 문화로 읽다] 대구 골목길에 대한 인상 비평
  • 최이규
  • 환경과조경 2023년 10월

석류나무, 콩국 냄새, 오페라, 고요하고 바람이 정체된 밤공기. 대구의 골목길 인상들이다. 사뭇 소박하다. 대구란 도시는 한 쪽으로 치우치는 정치색을 제외하고는 딱히 뭐라 연상 작용이 없는 곳이다.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도시랄까. 어지간해서는 좀처럼 올 일이 생기지 않는 도시. 부산, 제주, 속초처럼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라이프스타일 도시 근처도 못가는 무척 심심한 도시다. 대도시지만, 그 흔한 호텔 체인도 없다. 노보텔이 있다 없어지고, 최근에 매리어트가 하나 생겼다.

 

아마 한국에서 재미없는 도시 뽑기 경기를 한다면 1, 2위를 다툴 만한 라이벌은 대전 정도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구에 와서 할 만한 유일한 소일거리는 구도심의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 골목길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냐 묻는다면, 그런 건 기대하지 말고 그냥 잠자코 걸어볼 수는 있다고 하겠다. 대구는 무채색의 도시다. 약간 거무스름한 회색이랄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도시. 대구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고요함이 아직 뇌리에 남아있다. 늦여름이었고,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근처 골목을 돌아다녔다. 마치 도시만 남겨두고 모든 사람들이 휴거해 버린 분위기는 적막함 이상의 정체된 흐름이었다. 분지라 그런가. 고요함에도 색이 있다면 아마 검회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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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전경 ©대구시

 

 

일전에 대구의 어바니스트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근대골목지도라는 걸 만든 역사 연구가인 권상구에게 외지인으로서 느끼는 대구의 도시색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한동안 대구시가 공식적으로 내세웠던 도시 브랜드가 ‘컬러풀 대구’였는데, 나는 이 말이 더없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고 대답했다. 정치적 쏠림에 대한 시니컬한 농담인지, 아니면 지루한 도시에 대한 반어법적 표현인지, 다양성에 대한 뜬금없는 강조라니. 목표와 현실이 이렇게 수만 광년 떨어져 있어도 되는 것인가. 대구는 채도가 낮은 도시고, 굳이 그걸 감출 필요가 없다. 단단한 무채색은 세련되고 깊다. 요즘 대구에서 오픈하는 새로운 상업 공간들은 꽤나 감각적이고, 그건 블랙으로 요약된다. Green is the new black(초록이 새로운 표준이 되다)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나무조차도 회녹색이다. 조용히 골목을 걸으면서 메뉴가 적당하고 디자인이 괜찮은 카페에서 공간과 시간을 즐기는 것. 내가 추천할 수 있는 유일한 팁이다. 낮에는 더위 탓에, 어느 정도 어두워진 밤거리를 걷는 것을 권한다. 습기에 눅진해진 공기 사이를 헤쳐 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대구는 천만그루 나무 심기 등 나름 도시 녹화에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 생활자로서 특별히 무성한 도시라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오히려 나에게 대구의 일반적인 골목은 가끔 촘촘히 박혀있는 붉은 석류열매와 함께 연상된다. 예전에는 사과가 유명했다고 하지만, 이제 대구와 사과를 연관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주택가를 걷다보면 종종 만나는 주렁주렁 열린 과일이 석류다. 붉게 익은 석류와 땅에 떨어져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과육은 아마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그 아래에서 평상을 짓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쉬고 있는 노인들을 볼 수 있다. 석류는 이란 근처의 중동이 고향이니, 한반도에서는 무조건 남부 수종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적은 대구에서 잘 적응했다.

 

팔공산과 비슬산 줄기에 둘러싸인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은 기후 외에도 독특한 역사적 궤적을 만들었다. 대구 시내는 한국의 대도시 중 거의 유일하게 한국전쟁의 직접적 피해를 겪지 않은 곳이다. 미8군 사령부의 제공권 덕에 폭격이 덜하기도 했고, 육상 전투가 낙동강 전선에 한정되었기에 연합군이 지켜낸 마지막 요충지였다. 부산의 경우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자리 잡으면서 일종의 난개발이 진행된 것과 달리 대구는 일제가 계획한 도시 구조를 이어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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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의 로구로(목재선반가공) 가게

 

 

1960~1970년대, 섬유가 주축이 된 공업화와 국가산업단지 조성 또한 성서와 서대구 지역에서 꽤나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초량 일대에 남아있던 적산가옥이 빠르게 소실된 부산과는 대조적으로, 대구는 군산과 함께 상당량의 일식 가옥을 보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북성로 일대는 일본식 상점가인 마치야에서 해방 후 소규모 공업사 골목으로, 최근에는 다시 예전 가옥의 복원을 통한 재생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재활용하여 금속과 전기, 공구 등을 취급하는 제조업이 사뭇 어울리지 않는 목조 적산가옥에 자리 잡게 되었다. 100년 가까이 된 건물 안, 온갖 기계의 굉음과 기름때가 거뭇거뭇한 설비 사이에서 작업 중인 수작업 장인들, 일명 브리콜레르bricoleur. 이들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소위 국가적으로 창조경제를 외치던 때였다. 개인이 가진 아이디어를 시험하고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소규모 공업사의 존재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북성로는 일찍부터 일종의 하드웨어 액셀러레이터로 기능해 온 셈이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려 가면 물어물어 그걸 제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북성로 어디에선가 찾을 수 있다. 발명이나 디자인, 혹은 그저 만들기에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이곳은 영감을 주는 곳이다. 서울로 치면, 을지로나 성수동, 부산의 신암로 같은 곳이랄까. 하지만 막상 북성로에서 뭘 만들기는 쉽지 않다. 업주들이 고령화되어 현장에서 통용되는 은어와 그들만의 용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체계화된 검색 도구가 없어 온종일 발품을 팔아도 허탕을 칠 때가 많다.

 

권상구는 현장에서 쓰이는 단어들을 수집하여 요즘 우리가 알아들 을 수 있는 말로 풀어낸 책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단지 지나간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나 단순히 지적 취미에 그치지 않으려면 기술자와 기술을 데이터베이스화 하여 손쉽게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명맥이 끊어질 손기술들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후계자들에 대한 교육을 지원하고 양성하는 일이다. 적산가옥이라는 과거의 유물보다 거기서 쌓인 경험과 노하우가 훨씬 값지기 때문이다.

 

북성로 서쪽 끝 지점은 유서 깊은 달성공원이다. 대구의 종가집이라 할 달성 서씨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일제가 신사와 동물원으로 바꾸었다. 한강 이남의 창경궁 정도가 되겠다. 지금은 이용자의 대다수가 노인들이라 탑골공원의 분위기를 풍기는데, 역시나 매일 새벽에는 도로변과 인근 골목에서 장터가 열린다. 오전 4시부터 상인들이 좌판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어둑어둑한 길에서 생선이나 채소를 파는 모습이 이채롭다. 차량 통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도로는 사람들로 붐벼 널찍한 프롬나드를 방불케 한다. 이런 곳을 돌아다니는 전문 상인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작은 소쿠리에 담아 파는 할머니들도 볼 수 있다. 뱀파이어처럼 새벽 시장은 해가 뜨면 파장 분위기가 된다. 주변 상권에는 아침부터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주를 들이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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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대구시

 

 

환경과조경 426(2023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최이규는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과 환경관리학을 전공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내외 설계사에 근무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공과대학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식물벤처기업 에어리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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