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모아 ([email protected])
디자인하는 엔지니어
-수상 축하드립니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네가 젊냐?’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어요. 나이가 딱 만 45세거든요. 젊은 조경가 지원 조건 중 하나가 만 45세 이하의 조경가이니, 경계에서 받은 셈이죠.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축하해줬고, 소식이 뜸했던 사람들의 연락을 받기도 했어요. 『환경과조경』 표지 보고 연락하더라고요.”
-사진을 열심히 찍은 보람이 있네요. 수상 소식을 듣고 새로운 클라이언트가 찾아오진 않았나요.
“아쉽게도 아직은 없습니다.”
-남기준 편집장이 수상 소식을 전했을 때, 엄청 놀랐다고 들었어요.
“누가 절 추천했다는 걸 몰랐던 터라 놀랐어요. 이전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기도 했고, 매년 수상자 발표 소식을 보면서 수상 자격에 대한 생각이 약간 모호해졌었거든요. 전 전통적인 조경 설계를 주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시공과 정원 일을 많이 하는 편이라 젊은 조경가와는 결이 안 맞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어요. 그래서 당황스러우면서도 쑥스러웠죠.”
-인터뷰를 준비하며 2020년에 제출한 지원서를 다시 읽어봤어요. 자기소개서에 인상적인 문구가 있더군요. ‘디자인하는 엔지니어’. 스스로를 표현한 문구인데, 디자인하는 엔지니어는 일반적인 디자이너, 일반적인 엔지니어와 무엇이 다른가요.
“다르다기보다 순차적인 단계라고 봐요. 설계 초반에 콘셉트를 잡고 초벌 그림을 그리고 형상을 만드는 게 디자이너라면, 이를 구체화하고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게 엔지니어죠. 조경 설계의 기본 구상, 기본계획 단계에서 디자이너적 역량이 중요한 만큼 시공을 위한 실시설계 단계를 뒷받침하는 엔지니어적 역량도 중요해요. 그런데 현재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사이에 괴리감이 좀 있어요. 설계 후 시공을 맡기면 이건 그림일 뿐이고 시공할 수 없다는 말 들어본 적 있을 거에요.
그런데 또 시공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기 어려워지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단계에서 실시설계와 실제 건설 공사를 염두에 두고 설계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가 용이해지고, 효과적인 창의가 돼죠. 기술에 관심을 갖고, 또 염두에 두고 디자인 작업을 하기를 바랍니다.”
-언제부터 조경가를 꿈꿨나요.
“사실 조경이 뭔지 잘 모르고 조경학과에 입학했어요. 원래는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수능을 본 후에 건축학과, 선박공학과, 조경학과에 지원했죠. 그중 선박공학과와 조경학과에 합격했고요.”
-원래 공학 쪽에 관심이 많았나 보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본래 수치를 칼같이 다루는 것보다는 말랑말랑하고 시각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걸 훨씬 좋아했어요. 아기자기하고 공예적으로 만드는 데도 관심이 있었고요. 공대는 조금 삭막할 것도 같았고, 학교 캠퍼스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조경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럼 조경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확신을 언제 했나요?
“운 좋게 학교를 다니며 ‘밝바치’라는 조경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학교 수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얻었죠. 답사도 즐거웠고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재미에 더 즐겁게 활동했어요. 전공에도 더 애정을 갖게 됐고요. 워낙에 철이 없어서 조경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졸업하고 나서 바로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4년 동안 사회생활을 통해 등록금을 환수해야겠다는, 딱 그런 마음으로 취직해서 일했어요. 주어진 대로 일하는 철없는 신입사원이었죠.
그러던 중 다리를 크게 다쳐서 수술을 받고 3개월 정도 입원해서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그 시간이 계기가 됐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앞으로 뭘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됐어요. 할 일이 없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전공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교양, 소설, 자기 개발서까지.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뭘 해야 할지 인생을 좀 더 구체화하는 시간을 보냈죠.”
-엔지니어적 면모를 갖추게 된 건 역시 첫 직장인 종합엔지니어링 회사의 영향이 큰가요?
“첫 직장은 엔지니어링 회사가 아니었어요. 조경설계사무소를 일 년 정도 다니다 선진엔지니어링으로 자리를 옮겼죠. 중간에 쉬면서 배낭여행도 다녀왔고요. 처음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떨어진 줄 알았어요. 포트폴리오를 되돌려 받기 위해 회사에 방문했다가 인턴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인턴 생활을 하다가 정직원이 됐죠.”
-일반적으로 조경설계가를 꿈꾸는 학생 대부분이 조경설계사무소에 가기를 원하잖아요. 엔지니어링 회사에 입사하면 처음에 무슨 일을 하는 지 궁금해할 것 같아요.
“그 직원이 잘하는 걸 시키죠. 어떤 툴을 잘 다룬다면 그 툴을 다루는 일을 우선 맡길 테고, 졸업 작품이나 논문에서 다룬 주제와 부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면 그 팀에서 일을 하게 되기도 하고요. 제 경우에는 신입사원 시절에 워낙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고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던 것 같아요.
조경설계사무소와 종합엔지니어링 회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설계사무소가 설계 프로젝트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춰 업무를 진행한다면, 종합엔지니어링은 설계 구현을 뒷받침하기 위한 부가 업무도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하루 일과가 굉장히 빡빡한 대신에 출퇴근 시간, 야근 시간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편이죠. 돌아보니, 제가 설계사무소와 엔지니어링 회사를 다닐 때는 업무 시간 자체가 굉장히 길었네요. 요새는 여건이 좀 나아졌다고 들었어요. 그람디자인만 해도 야근이 거의 없는 편이고요.”
-엔지니어링 회사에 다니는 경험이 시공을 염두에 둔 설계를 할 수 있는 조경가가 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겠네요.
“엔지니어적 역량이 단순히 시공에 국한된 건 아니에요. 물론 최종 목적지는 시공 결과물이겠지만, 시공에 필요한 전반적인 사항, 예산, 공정, 여러 행정 절차까지도 설계 단계에서 고려할 수 있는 설계자가 되는 걸 뜻합니다. 물론 디자이너도 법적인 사항을 사전에 검토하겠지만, 좀 더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는 일은 엔지니어가 하니까요. 설계 실현을 위한 포괄적인 사항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하는 게 효과적인 설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감각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조경 설계를 할 생각이라면 두루두루 많은 걸 경험하기를 권해요. 우리 회사 직원에게도 늘 하는 이야기예요. 아이디어나 표현력이 중점이 되는 기본 구상이나 설계공모 같은 계획 파트의 업무도 해봐야 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다음 단계인 실시설계 과정도 치열하게 경험해봐야 해요. 예산 때문에 새로운 공법을 고민하는 과정도 좋은 경험이 됩니다. 실제로 시공 현장에서 실시설계 단계에서 도면화한 것들이 다르게 해석되어 더 나은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를 두루두루 경험하고 하는 설계와 그렇지 않고 한 설계는 전혀 달라요.”
설계사무소 대표가 되다
-소장님과 처음 연락을 주고받은 계기가 2016년 5월호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이었어요. 2008년이면 소장님이 32살 때죠. 또래에 비해 꽤 어린 나이에 창업을 했는데, 두렵지는 않았나요.
“당시의 치기 어린 욕심에 벌인 일이기도 했죠. 흔히 그 연차에 갖게 되는 내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고, 연봉에 대한 불만도 조금 있었고요. 말 그대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할 수 있던 도전이었습니다. 하다가 잘 안되면 다시 취직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죠. 만약 지금처럼 40대를 넘긴 나이에 결혼을 해서 자식도 있는 상황이었다면 더욱 치밀하게 준비했을 거예요. 거래처나 수주 대상도 더 꼼꼼히 살폈을 거고요. 당시에는 잘못돼도 금방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모험심이 있었죠.”
-사무실을 열면서 이것만큼은 반드시 지킬 거라고 다짐하며 세운 원칙이 있다면요.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안 좋다고 느낀 점들이 없는 회사요. 야근이나 주말 출근이 없는 회사, 월급이 밀리지 않는 회사.”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나요.
“월급은 밀린 적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야근은 거의 안 해요. 어릴 때 철야나 야근을 너무 많이 하니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내가 뭐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면 자존감도 낮아지고 자아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까지 들어요. 전 제가 쉬고 싶을 때 못 쉬는 게 너무 불만이었어요. 적어도 내가 오늘은 쉬어야 한다고 느끼면 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독립 후에 직원들에게 습관적인 야근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고요. 꾸역꾸역 야근한다고 좋은 설계가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야근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해요.”
-야근에 대한 생각이 바뀐 이유는 뭔가요.
“조금 다른 개념의 야근이에요. 어떤 일의 경우 연속성이 필요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창의적인 아이디어 도출을 위해 고민하는 일이요. 완성된 설계안을 도면으로 그린다든지 하는 기술적인 일은 굳이 연속적인 작업이 필요하지 않죠. 하지만 깊이 있는 고민을 하다가 끊기면 어려움이 생겨요. 물론 야근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결국 자기 몫이거든요.
굳이 사무실에 앉아서 야근하며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몸은 사무실을 벗어나도 되지만, 생각의 스위치는 꺼놓지 말아야 해요. 퇴근하는 순간 그 스위치를 내려버리면 다시 원점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해요. 반면 늘 궁리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으면, 주말에 놀러나가서 주변을 구경하다가도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람디자인의 그람은 무게를 재는 단위를 뜻하나요.
“초창기 그람디자인을 창업하며 세 명의 대표가 함께 만든 단어예요. 조경설계사무소 명부 같은 게 만들어지면 초반에 위치할 수 있도록 ㄱ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짓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어요.”
-굉장히 전략적인 이름이었네요.
“그렇죠. 그람은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무게의 최소 단위이기도 해요. 보통 설계에서 다루는 단위가 킬로그램이나 톤인데, 그보다 좀 더 디테일하고 아기자기한 부분까지 다루겠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또 일에 경중을 따지지 않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사실 진중한 분위기를 잘 견디지 못해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을 짓고 싶었어요.”
-설립 초기에는 대표가 셋이었군요.
“5년 정도 세 명의 대표가 함께했고, 지금은 저와 경정환 대표가 함께 이끌고 있습니다.”
-사무실 규모는 어떻게 변해왔나요.
“현재 직원은 절 포함해서 9명입니다. 구성원은 계속해서 변했고, 규모는 전반적으로 커진 편이에요.”
-창업 초기에 공모 작업을 많이 했더라고요. 시간적·자금적 여유가 괜찮았나요?
“생각보다 많이 하진 않았어요. 다만 공모의 내용을 살펴보고 우리가 자체적으로 소화가 가능한지 판단한 후 부담 없이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공모 지침을 보면 제출 분량부터 확인합니다. 신생 회사이니 그람디자인을 알릴 방법을 찾고 싶었고, 공모전 수상이 그 방법 중 하나였죠. 또 공모를 계속 끊임없이 하는 것 자체가 실력 배양에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요.”
-여러 공모 중에서 ‘한글글자마당 조성 아이디어 현상공모’(2011)가 큰 의미를 남긴 것 같습니다. 포트폴리오에서 “디자인 목표는 분명했고 디자인 전략도 명쾌하고 단순했다. 한글이 가진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면 된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배우기 쉬운 글자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한글의 구성 원리는 편리성과 실용성을 담고 있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철학을 알게 되면서 디자인은 쉽고 명쾌해야 하는 디자인의 관점을 줄곧 견지하게 되었다”고 한 게 기억나요.
“설계는 사람들에게 단박에 읽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길고 장황하거나 너무 무겁고 진중하면 이해하기 어렵죠.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의 클라이언트는 조경 전문가가 아닌 경우가 많을 테니까요. 고차원의 이론과 이념으로 무장한 설계는 그 용어도 모르는 사람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뿐더러 설득력도 없는 공간이 될 겁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눈길을 끌 수 있는 설계는 직관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해요. 그만큼 명쾌해야겠죠. 그래서 콘셉트나 주제를 정리할 때 어려운 용어를 쓰는 걸 경계하는 편이에요. 누구나 읽기 쉽고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설계를 하고 싶어요.”
-독립할 때 가장 고민하는 게, 회사 설립 후 무슨 일을 하느냐 일 것 같아요.
“제가 운이 좋게도 흐름을 잘 탔어요. 사무소를 열었던 2008년은 4대강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일거리 자체가 많고 설계사무소가 많이 늘어났던 해거든요.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함께 턴키에 참여할 조경설계팀을 찾는 경우도 많았고요. 초반에는 전에 일하던 선진엔지니어링에서 일을 따오기도 했어요.
그람디자인을 열면서 이런 일을 하겠다고 정해놓은 것도 아니었고, 단골 고객도 없었어요. 그래서 설립 초창기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가능성을 찾은 곳이 정원 분야였어요. 앞으로 정원을 설계할 뿐 아니라 디자인 빌드까지 해내는 사무소로 자리 잡아 무언가를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보통의 조경 설계도 놓치지 않고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과정을 거치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소위 말하는 단골 고객도 생겼어요.”
공공 정원에서 상업성을 꾀하는 법
-주로 하는 일은 정원 설계인가요.
“많은 사람이 그람디자인을 정원만 만드는 회사라고 오해 아닌 오해를 하더라고요. 회사 업무 전체를 보면, 절반은 조경 설계고 나머지가 정원 관련 프로젝트에요. 특정 시기를 뽑아서 따지면 정원 프로젝트가 압도적으로 많을 때도 있지만, 총 업무량을 따지면 조경 설계와 정원 프로젝트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성원 역시 설계하는 직원, 정원하는 직원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모든 직원이 두 분야의 일을 병행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 주택 정원은 저희 사업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주택 정원은 정원의 주인이 직접 만들고 가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유지·관리와 정원 문화와 산업 부흥의 측면을 살피면 그 편이 더 장점이 많고요. 되도록 공공 정원을 많이 만들려고 해요.”
-정원 설계를 할 때 조경 설계와 달리 어떤 면을 더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특별히 다른 태도를 취하진 않아요. 결국 조경 설계가 정원 설계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니까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주택 정원의 경우에는 좀 더 사용자에게 특화된 공간이죠. 규모도 그렇고요. 정원을 이용하게 될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중요하죠.”
-서울숲과 서울어린이대공원에 꾸준히 어린이를 위한 정원을 만들어 왔죠. 대상지 조건이 꽤 비슷한 편이잖아요. 어린이정원을 만들 때 스토리텔링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는데, 한계에 부딪치진 않나요? 영감은 어디서 주로 얻나요?
“우연치 않게 어린이정원을 만들 기회를 얻었는데, 어느덧 어린이정원 7호 설계 준비를 하고 있네요. 사실 지금 한계에 다다랐어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전에는 본격적으로 설계에 돌입하기도 전에 아이디어가 막 떠올랐거든요. 마녀의 집을 만들었으니 이제 한국적인 도깨비를 등장시켜 보자, 답사를 가서 본 미니어처 정원이 인상적이었으니 나도 만들어보자, 미니어처 정원을 만들었으니 거인의 시점에서 정원을 바라보자 하는 식으로요. 끊임없이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내심 똑같은 주제의 정원을 다른 버전으로 만드는 것도 의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화두는 평소에 미리 찾아놓는 편이에요. 발굴해 놓은 화두를 구체화해서 설계로 풀어내고요. 영감을 채우기 위해서 책, 영화,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구분 없이 봐요. 특정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기보다 평소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면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죠. 그렇게 얻은 아이디어를 잘 모아놓고요. 모아둔 아이디어를 상황에 맞춰 꺼내 쓰는 방식이죠.”
-아이디어 정리에는 어떤 툴을 쓰시나요?
“아무 때나 편하게 쓸 수 있는 네이버 메모장을 많이 사용합니다.”
-공공 공간에 만드는 어린이정원의 경우 어느 나이대의 아이가 올지 예측할 수 없잖아요. 안전 관련 규정이 굉장히 엄격하기까지 해서 설계가 까다로울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이 불만입니다. 관리자나 발주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안전 문제에 너무 예민하고 민원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걸 너무 두려워해요. 어린이정원은 어린이 놀이터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약간 높은 둔덕만 있어도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아이가 떨어져 다치는 상황을 과도하게 걱정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법적으로 놀이터 안전 규정은 있지만 정원 안전 규정은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예산이 한정적인 ‘공공’ ‘정원’이라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해요.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듣게 되는 말이 저관리 정원입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무관리/무민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관리가 하나의 설계 전략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정원은 기본적으로 계속 관리해야 하고 가꿔야 하고 지속적으로 보수가 되어야 하는 곳이에요. 만약 유지‧관리 예산이 충분하다면 펜스 없이 풍성한 관목을 울타리 삼아 아이들의 안전을 도모할 수도 있고, 화단과 녹지를 더 멋스럽게 만들 수 있거든요. 여유가 없으니 정원 디자인이 밋밋해질 수밖에 없죠. 안전에 관련한 시각이 조금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개인적으로, 비가 오면 어린이정원에 사용한 목재가 더욱 짙은 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어요. 목재를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혹시 선호하는 소재가 따로 있나요?
“늘 강조하는 점인데 가격이 저렴한 소재를 선호해요. 고가의 소재, 희귀한 소재보다 구하기 쉬운 재료가 좋아요.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친환경적인 부분을 신경 쓰기도 하고요.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에 굉장히 매력을 느껴요. 언젠가는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소재를 생각합니다. 대형 건설 현장에서 멀쩡한 자재를 버리는 걸 많이 목격했거든요. 뜯지도 않은 석재 블록을 팔레트 채로 버리기도 하고요. 남은 재료를 운송하는 데 드는 비용이 폐기 비용보다 더 드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버려지는 재료를 보며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완성도를 크게 해치지 않는 상황에서는 재활용 가능한 자재를 사용하고 있어요.”
-공공 정원 작업이 영리적으로는 괜찮은 편인가요?
“물론이죠. 시대적 흐름에서 공공 정원이 중요해지고 있어요. 원래는 톱다운 방식의 관급 발주 정원 사업이 지배적이었는데, 최근에는 민간 기업에서 ESG 경영 차원으로 기부 정원 사업을 많이 진행하고 있어요. 그람디자인의 최근 작업도 대부분 그런 사업들이고요. 물론 사업비가 충분치는 않아요. 그런데 공공 정원 프로젝트 경험이 많이 쌓이다 보니 원가를 절감하는 요령이 생겼어요. 적은 비용과 저렴한 시공 방식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잘 찾아내죠. 소재를 재활용하는 방식을 추구하는 점이 원가 절감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공예적인 작업을 직접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보통 시설물 업체에 외주를 맡기면 그만큼 시공에 드는 비용도 커지는데, 그 작업을 직접 하니 예산을 절약 할 수 있죠.
공공 정원 일을 많이 하지만 그람디자인은 영리 기업이라는 점을 늘 잊지 않아요. 하지만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선 끊임없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공공 정원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더 많은 예산이 주어진다면 더 좋고요. 그래도 사회 공헌 차원의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는 게 의미 있고 행운이라고 느껴요. 직원들에게는 큰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안하기도 해요.”
식물의 존재감
-전 학창 시절 식재 수업이 참 어려웠어요. 식재 방법을 배운다기보다 수목학 수업의 연장선으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결국 식재에 대해서는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졸업한 것 같아요. 정원은 다양한 식물을 다루고 배식해야 하는 작업인데 어떻게 공부했나요.
“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어요. 식재 설계를 잘 몰랐고, 이전 직장 생활할 때도 식물 다룰 일은 거의 없었죠. 관심도 깊지 않았고요. 그람디자인을 차리고 정원 쪽의 일을 하게 되면서 관심이 커졌어요. 평소에도 식물 수종이나 나무의 특징을 유심히 살피게 됐고요. 식재 설계는 작정하고 공부한다기보다 경험을 통해 축적되어서 쌓이는 것 같아요. 이런저런 나무를 심어보고 꾸준히 모니터링하면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종들이 늘어나요. 결국 관심의 문제에요. 식재 설계는 배식과 조합의 문제죠. 어떤 교목과 관목, 초본이 어울린다는 공식은 없어요. 생육 특징이 맞다면 언제든 새로운 배식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봐요.
어떤 식물을 사용하고 싶다면, 그 식물의 생육 특성, 유래, 의미를 잘 찾아보는 게 중요해요. 이 부분이 스토리텔링과 연관되기도 하고요. 평소 식물의 의미를 자주 찾아보는 편이에요. 서울숲 설렘정원의 경우, 야외 결혼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인데 어렵게 호두나무를 구해 심었어요. 북유럽의 연인들은 호두나무 가지를 장작불에 넣었을 때 불꽃이 탁탁 튀는 정도를 보고 애정의 깊이를 점치는 풍습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처럼 이야기가 있는 수목을 심었을 때 사람들이 흥미로워 해요. 어린이정원을 소개할 때는 늘 산사나무 이야기를 해요. 해리포터의 지팡이가 산사나무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면 다들 관심을 가지고 산사나무를 기억해요. 그 순간 산사나무가 의미 있는 존재감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설계도 중요하지만 조경의 주요 소재인 식물에게 사람들이 다가가게 만드는 과정도 중요해요.
막 사회 초년생이 된 조경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시공된 조경 현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관찰하는 거예요. 일 년이 다 가도록 수목이 성장하고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기소개서에서 디자인 빌드까지 하는 사무소를 차린 이유를 “빠듯한 공사비의 문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디테일에 관하여 글과 도면으로 표현하여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더라고요. 극복하는 방법이 있나요? 시공 도면 그리는 노하우라든지.
“저도 발주처가 요구하는 대로 양식에 맞춰 캐드로 도면 그리는 건 똑같아요. 다만 조경의 특성상 도면에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아쉬워요. 메타세쿼이아 같이 비교적 정형적인 수형의 수목이 있는가 하면, 진달래처럼 가지가 뻗은 정도나 잎이 벌어진 정도가 저마다 다른 수목이 있죠. 도면으로 이를 표현하기는 어려워요. 물론 식재할 수목을 설계 단계에서 구해와 어떻게 심을지 고민하며 설계하는 방법도 있어요. 실제로 그 방법을 택하는 설계사무소도 있고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죠. 보통은 예상한 것과 다른 수형의 수목이 현장에 도착해요. 이럴 땐 수목 하나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옮긴 수목에 맞추어 다른 식물과 수목을 함께 옮겨야 하죠. 그래서 저는 대형 교목 정도만 위치를 특정하고, 아교목과 관목, 지피 초화는 물량만 확정해
도면에 그립니다. 현장에서 시공하며 그 위치를 유연하게 조정하죠. 포장이나 시설물도 현장 여건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세밀하게 그리기보다 큰 맥락을 보여주는 도면 그리기를 선호합니다.”
-시공 현장을 24시간 내내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을 텐데, 작업자에게 주는 가이드라인이나 주의사항이 있나요?
“오히려 저보다 시공에 능한 전문가가 더 많아요. 그래서 특별한 주의사항을 드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일부러 나무를 삐뚤게 심어야 하는 경우 같이 특수한 상황일 때만 미리 알려드리죠. 현장을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고, 믿고 맡겨도 되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때에 따라 달라요. 시공 업무를 직원들과 직접 소화하는 경우도 많아요. 작은 공간 포장을 위해서 전문 작업 팀을 부르기는 곤란하니까요.”
-직원들이 설계와 시공 업무를 병행하는 걸 힘들어하진 않나요?
“고충이 있죠. 설계 작업할 때는 아침 10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보내는데, 시공 현장은 아침 7시부터 시작해요. 오후 4시 반에 일이 끝나면 사무실로 돌아와 당장 내일 작업해야 하는 도면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고요. 생활 패턴이 완전히 달라져요. 작업 모드를 자주 바꾸는 걸 버거워하는 직원이 많아요. 그런데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죠. 나름대로 여유를 찾는 법도 스스로 찾게 되고요. 사무실에서 설계 작업을 한다고 하루 종일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쓰는 게 아닌 것처럼, 현장에 나간다고 내내 삽질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모드를 빠르게 전환하는 영리한 나만의 루틴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게 중요해요.”
따로 또 같이
-정원사친구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요. 2018년 5월호 ‘따로 또 같이’ 특집에서 “때에 따라 일시적으로 객원 활동을 하는 이도 있고, 각 회사 소속원이 이직이나 퇴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람디자인과 오랜 경력의 설계와 시공 노하우를 가진 디자인스튜디오 이레(조용철 대표) 그리고 영국 유학 후 대학원에서 정원에 관한 더 깊은 연구를 이어가는 조혜령이 주축”인 그룹이라고 소개했는데, 여전한가요?
“가입, 탈퇴의 개념이 있는 건 여전합니다. 그런데 디자인스튜디오 이레가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정원사친구들 작업에 참여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일을 자주 함께 못할 뿐이지 여전히 자주 왕래하는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그람디자인과 정원사친구들의 지향점은 다른가요?
“다르진 않아요. 한 몸으로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고요. 그람디자인에는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직원이 많아요. 현재 그람디자인의 직원들에 객원 멤버를 더해 정원사친구들을 꾸려가는 상황이에요. 정원 관련 프로젝트, 정원 문화 활동을 정원사친구들이 진행하고 엔지니어링적 설계와 관급 설계, 설계공모를 전반적으로 그람디자인이 진행하죠. 정원사친구들의 프로젝트 특성에 따라 조경 시공 현장 담당 소장이나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 시민정원사가 객원 멤버가 되어 함께 작업하고 일이 끝나면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에요.”
-두 그룹의 일을 병행하고 관리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그 열정이 부럽습니다. 그런데 그람디자인이 때때로 정원사친구들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 힘들진 않아요. 그리고 실제로 그람디자인과 정원사친구들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입사하는 직원도 있어요. 조경 설계 일도 하고 정원 시공 일도 해야 된다고 말하면 당황하죠. 조경 설계만 배운 직원이 현장에 나가면, 전문 기능공이 아니기 때문에 시공 작업을 잘 못할 뿐더러 뭘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거든요. 그래도 늘 현장에 데리고 갑니다. 실제로 하는 일이 없더라도 시공 반장과 전문 작업자가 시공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도움이 돼요. 할 일이 없으면 옆에 와서 쓰레기라도 줍게 해요. 책상에서 설계만 하고 작업 내역서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업 공정이 실제로 얼마나 걸리는 지 알 수 없어요. 간결한지 복잡한지 현장에서 직접 봐야 알 수 있죠.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같은 결과물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어떤 순서로 시공하는 게 합리적인지도 체득할 수 있어요. 현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본인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죠.
설계에도 도움이 돼요. 설계안을 3D 작업으로 만들어보라고 하면 풍성한 나무가 가득한 공간을 만들어놓기 일쑤거든요. 그런데 실제 현장에 가보면 가지치기가 잔뜩 된 앙상한 나무가 심겨지고 있죠. 머릿속 이미지와 완전히 다르게 시공되는 현장을 보며,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의 공간이 되려면 6개월은 더 걸리겠구나, 봄이 되면 그 풍경을 볼 수 있겠구나 하면서 현장과 설계의 괴리감을 줄이게 돼요.”
-정원사친구들처럼 ‘따로 또 같이’ 협업하는 팀을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런 팀을 꾸리기 전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영리를 위한 프로젝트 팀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비용이나 협업 방식 등을 사전에 계약 방식으로 명확히 정리해두어야 해요. 비용에 대한 부분을 모호하게 정하지 않은 채로 협업을 진행하다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를 보기도 했어요. 귀한 시간을 내고 기술력을 투자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만큼, 누구도 서운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마무리를 짓는 게 중요해요.”
-2021년에 선보인 드포엠 가든과 아테온 정원이 정원사친구들의 작업물이죠? 아파트의 조경 공간의 감성을 보여주는 드포엠 가든, 자동차의 콘셉트와 특성을 드러내는 아테온 정원 모두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드포엠 가든은 당시 대림에 근무하고 있던 안동혁 소장(HLD)을 통해 협업하게 된 프로젝트에요. 서울식물원 온실에서 선보인 ‘식물극장’ 콘텐츠가 이 프로젝트 수주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대림의 아파트 브랜드인 ‘e-편한세상’의 조경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시적인 경험을 정원으로 구현했어요. 아테온 정원은 서울가드닝클럽의 이가영 대표의 제안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입니다. 식재 연출을 함께하자고 정원사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모두가 흥미롭게 받아들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 몇 년 전부터 조경과 무관한 기업이나 단체들이 전시나 홍보의 목적으로 정원과 식물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런 경향을 감지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도 운이 좋게 협업을 통해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클라이언트의 반응은 어땠나요?
“클라이언트도 만족했고, 시민과 방문객의 호응도 좋았어요. 확실히 기업에서 만드는 홍보 공간은 정원의 항상성을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조성 공사에서 그친 게 아니라 유지·관리 계약도 체결되어서 작업이 이어져요.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에 또 비슷한 작업 요청이 들어오지는 않았나요?
“정원 관련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성격의 협업 제안이 지속적으로 오는 편입니다. 마켓컬리의 ‘샛별숲 키우기 프로젝트’의 경우는 기후위기에 대응해 탄소 저감을 꾀하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었어요. 일정 공간에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해 지구를 위해 작지만 의미 있는 노력을 하는 사업입니다. 현대위아가 ESG 활동으로 펼치는 ‘현대위아초록학교’ 프로젝트를 통해서 특수교육기관에 배리어-프리 정원을 조성하기도 했고요. HLD와 함께 작업한 ‘EV6 언플러그드 그라운드 성수’는 아테온 정원처럼 상업적 홍보가 강한 프로젝트였죠. 전반적인 연출과 디자인 콘셉트는 HLD에서 진행한 상태였고, 식재 연출과 시공을 함께 했어요.”
-2015 대한민국 한평정원 디자인전에서 선보인 정원의 주제가 업사이클링이었죠.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에서는 물의 소중함을 다루었고요. 늘 재활용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일회성으로 열리는 전시 설치 작업에서도 그 원칙을 지키시나요?
“일시적으로 전시하는 정원에서도 충분히 친환경을 모색할 수 있어요.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적절히 잘 수거해 다른 공간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조경 전시 팀이 그렇게 하고 있고요. 기후위기나 친환경을 거대한 설계 철학의 화두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자원 낭비, 경제적 손실에 대한 관점에서 늘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직업이 생활을 잠식하지 않도록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요?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의 생활밀착형 정원 프로젝트를 최근에 마무리했고, 오늘은 전 직원이 모두 서울식물원에 크리스마스 정원을 꾸미러 갔습니다.”
-어쩐지 2층 사무실의 불이 다 꺼져 있더라고요(그람디자인은 직원들이 일하는 2층, 두 대표가 머무는 3층의 두 개 층이다). 크리스마스 정원 전시 작업인가요?
“서울식물원 실내의 작은 공간에 겨울 경관을 연출하는 일인데, 크리스마스 장식은 너무 뻔하고 표현이 한정적이라 겨울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 실내 화단을 만들고 있어요. 나뭇가지랑 억새를 잔뜩 싣고 가서 장식하고 있을 거예요. 또 내년에는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새로 어린이정원을 만들 예정입니다. 그린트러스트와 함께 서울식물원 내에 어린이 놀이 공간 조성 준비를 하고 있고요.”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 특집에서 ‘창업 전후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몇몇 창업 식구들의 퇴사를 꼽았었죠. “나와 함께 큰 모험을 택한 이들과 나의 비전을 공유하려 노력했지만 개개인의 비전에는 공감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는데, 지금은 직원들과 어떤 방식으로 비전을 나누고 있나요?
“아직도 첫 사회생활을 떠올리면 철야, 야근을 너무 많이 하는 과정에서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던 제 모습이 생각나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조경과 정원에 미쳐있는 사람이 되는 걸 경계합니다. 조경가는 직업일 뿐이에요. 직업 자체가 자신의 모든 생활을 잠식하는 상황을 피하려 합니다. 업에서 행복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개인의 행복을 찾는 것도 중요해요. 직원들의 생활과 일상이 모두 만족스러워지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비전을 공유하고 시야를 넓히는 가르침을 주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조경가가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여유를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현장에 직원들과 함께 나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시간적 여유와 경험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주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려하고 있고, 어느 정도 잘 진행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혹, 이런 것 왜 안 물어보지 싶은 건 없었나요?
“사무실 위치가 왜 부천인지 안 궁금하세요?”
-직주근접을 추구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나요?
“처음 조경설계사무소를 차릴 때 많은 사람이 조언했어요. 일을 잘 수주하려면 강남에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서울에 조경설계사무소가 너무 많았고, 태어나고 자란 곳이 부천인지라 부천의 관과 함께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물론 처음에 이곳에서 기반을 다지고 서울에 사옥을 짓는 꿈을 꾸기도 했죠. 경기도권에 자리 잡은 작은 무명의 사무소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이곳에 터를 잡은 언덕이 된 기분이에요. 일 잘하는 설계사무소는 당연히 서울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서울의 그럴 듯한 위치에 있는 사무소만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지역에 토착하고 섞여 들어가 좋은 프로젝트를 하는 회사가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게 발휘되고 있기도 하고요. 직원 뽑을 때도 사는 곳과 출퇴근 거리를 중요하게 봅니다. 좀 편한 일상의 상태에서 함께 일을 했으면 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일을 하는 게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니까요. 부천에 조경설계사무소가 대여섯 개 정도 있어요. 수가 적다보니 서로 경쟁해야 하는 구도는 아니고 도란도란 이웃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조경설계사무소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걸, 지역을 잘 알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