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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관계기술
  • 최윤석
  • 환경과조경 2023년 01월

“그림은 거들 뿐”(『환경과조경』 2021년 7월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란 글로 당돌한 나의 설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며 졸필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는데 또다시 설계 철학을 이야기하자니 벌써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26년 전 조경학과에 입학한 후 들은 첫 전공 과목은 조경학개론이었다. 첫 수업에서 교수가 사람 인人 자를 칠판에 쓰고는 조경이란 무엇인지 인자한 미소로 설명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아침 9시 수업인 데다가 전날의 음주 여파로 제정신이 아닌 신입생이었기 때문이다.

『조경학개론』 첫 장에 쓰인 ‘종합과학예술’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이 일에 종사하고 있다. 종합과학예술에서 ‘종합’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접두어라는 건 알겠는데, ‘조경은 과학이 맞나, 예술이 맞나’ 한 번쯤 깊게 고민하기보다 그저 그렇대 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조경 설계 실무를 해오면서 머릿속을 채운 여러 설계 철학 키워드 중 가장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과학’보다는 ‘관계’다. 융복합 시대에서 상황, 대상 등 서로 다른 성질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발견의 시작

일의 특성상 대상지는 선택 대상이라기보다는 주어지는 편이다. 모든 아이디어나 콘셉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주어진 대상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면서 유심히 살펴보고 관찰함으로써 설계가 시작된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떤 상황, 그 시기의 이슈를 발견해 대상지와의 관계에 대입해보면서 일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물론 담당자와의 대화에서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한 발견은 디자인의 이유가 된다. 순수 예술은 어떨지 몰라도 조경 디자인에는 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평면이든, 입면이든, 재료든 세세한 부분엔 늘 이유가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어떤 관계성에서 나온다.


쉽고 명쾌함

지하실에서 무모하게 그람디자인을 출발했던 2008년은 나의 부족한 역량을 직접 마주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대형 설계 회사들이 주요 프로젝트로 아파트, 대형 공원 설계를 다룰 때 우리의 일거리는 녹지 정비 사업이나 어린이 공원 리모델링 등 작은 규모의 설계 용역이 대부분이었다. 이전 회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는 디자인 이념이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였다. 하지만 주민 참여 예산 제도로 열리는 사업 등 소규모 사업 설계를 대하면서 이런 것이 필수인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사무소에서 열리는 공원 리모델링 주민설명회에 필요한 건 계획안을 쉽고 명쾌한 내용으로 풀어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실사용자인 주민들과 교감을 나누는 일이다.

 

그러던 중 ‘한글글자마당 조성 아이디어 현상공모’(2011)에 당선된 게고무적이었다. 한글로 조합 가능한 11,172자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나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고 명쾌한 아이디어가 중요하다고 보는 나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졌다. 한글 자체는 과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로 구성된 조합 원리를 살펴보니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 새삼 놀랍게 다가왔다. 글자를 구성하는 조합 원리와 규칙을 모든 글자를 나열하는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심사위원 모두 잘 아는 한글에 대한 시각적 조형성에 염두를 둔 배치보다 쉽고 명쾌한 방식을 제안한 우리의 배치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자연과의 관계

‘슈필라움(spielraum)’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친 단어로, 한국어로하면 ‘놀이방’이다. 그냥 노는 공간이 아니다.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새로운 것을 생각할수 있고 생산할 수 있는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지친 심신을 충전하고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정원 현장이나 농장이 나에겐 그런 곳이다.

 

몇 해 전부터 친구와 이것저것 해보는 농장을 꾸리고 있다. 일주일의 과도한 스트레스를 스스로 덜어내고자 매주 주말이면 늘 농장을 찾게된다. 울창한 숲과 풍부한 자연이 있는 곳이 아닌 허허벌판의 농장이지만 누구 하나 간섭하는 이 없고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정원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러 가지 공구를 써보기도 하고 딱딱해진 땅을 파내기도 하고 단단히 뿌리 박힌 잡초를 뽑아내는 등 땀과 근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들을 한다. 친구와 같은 작업을 함께 하기도 하고 작업 배분이나 계획 없이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흩어져 하기도 한다. 정식 계약을 하고 근무 시간이 정해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지루한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은 없다. 흔히 말하는 노동요나 라디오를 틀어 놓지도 않는다. 길가를 지나는 적당한 인기척과 차량 소음만 있을 뿐이다.

 

오늘은 이걸 해볼까 하다가 싫증이 나면 저걸 해보기도 하고, 그러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정원 식물을 가꾸거나 아무 상관없는 무언가를 괜히 열심히 하기도 한다. 한 번의 사계절을 겪으면서 나무와 풀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천천히 변화하는 날씨와 그에 따른 흙의 변화감과 촉감들을 느끼는 순간들이 위안을 준다.

 

근본적으로 이곳은 정원용 식물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본격적으로 삽목이나 채종(파종)을 통해 증식 시켜 보고픈 식물들, 현장을 꽉 채우고도 남아서 온 식물들, 보식과 교체로 뽑혀온 식물들, 정원 유지·관리를 하다가 꽃이 진 모습을 못 견뎌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버려질 위기에서 구출된 식물들이 있다. 거의 아사 직전의 식물이 몇 개월 후 회복하는 모습, 일 년 만에 키와 덩치를 불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 못지않게 재미있다.

 

그래서인지 책상으로 돌아와 설계에 임하면 완벽함, 완성도에 대한 조급함이나 압박감이 덜해진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하는 시간, 사람이 자연 현상을 인지하고 관계하는 활동 시간의 중요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관계성에 대한 고민은 자연 현상에 관한 생각으로 구체화 된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정영선 선생이 한 강의에서 한 말이 자연을 대하는 관점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 포기의 연꽃을 심는 것도 연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한다. 대나무를 심는다면 대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소나무를 심는 것은 소나무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보기 위함이다.”

 

사람과 사람

그래도 이 일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과 관계하는 작업물이다. 설계 내용에서도 그렇고 과정에서도 사람이라는 키워드가 유독 중요하게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애용할 장소를 만드는 관점이 우선 자리한다. 언제부터인가 답사를 가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공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소임을 충분히 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보다 더 나음을 생각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이 빠질 수 없다.

나를 조경가로 성장케 해준 것도 귀한 인연들이다. 상사부터 선배, 친구, 동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옆에서 지켜본 그들의 일하는 자세, 술자리 잡담에서 튀어나온 말 모두가 나의 관점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진행해 온 모든 프로젝트는 혼자만의 생각과 행동으로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그람디자인과 정원사친구들뿐 아니라 그 외 프로젝트에도 늘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 조력자의 역할만으로도 보람찬 성취감을 맛본 경험도 많다. 늘 많은 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내가 사람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늘 착한(?) 사람은 아니다. 이상한 갑질과 불합리함에 흥분하는 불같은 성격과 자존심이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벤치 클리어링 상황일 때 먼저 뛰쳐나가는 걸 말리는 역할을 해줄 사람들도 항상 곁에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조경학개론 수업의 사람 인 자는 아마도 지금의 생각을 형성해준 암시의 단어가 된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최윤석은 경희대학교에서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했다. 선진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조경레저부에서 실무를 익히고 2008년 그람디자인을 설립했다. 아이디어와 디자인에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명쾌함을 추구한다. 201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정원사친구들(gardening friends)은 정원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통해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장소 만들기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조경 설계도 하고 정원 시공도 하며, 조경가로서 어떤 장소나 소재의 가치를 발견해서 돋보이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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