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지평을 확장하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지원서를 천천히 다시 읽어봤습니다. 청소년기에 조경 분야를 접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능 성적에 맞춰 학과를 정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청소년기라고 했지만, 조경을 알게 된 시점은 수능을 본 후예요. 본래는 건축학과에 가고 싶었어요.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프랭크 게리가 만든 건물을 봤죠. ‘LA 월트디즈니 콘서트홀’로 기억합니다. 이런 건물이 있다니 하며 놀랐어요. 건축의 멋에 취한 거죠. 여담이지만 미국에서 일할 시절 그 건물 건너편에서 2년 정도 살기도 했습니다.”
-그럼 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간혹 고등학교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요.
“친구의 아버님이 임승빈 명예교수님(서울대학교)과 지인이었어요. 그때 조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건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오래전부터 공간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던 거군요.
“네. 어려서부터 미술과 발명, 창작이 접목되는 분야를 좋아했어요. 17살 무렵에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분명한 목표도 설정했고요.”
-그래서인지 학부생 시절부터 다양한 공모전에 참여했어요.
“군대에서 제대한 후 복학하기 전에 처음으로 학생 공모전에 도전했어요. 공모전 참여가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조경가로서 역량을 배양할 수 있는 유용한 경험 도구라는 걸 깨달았죠. 선배들의 도움으로 조경설계사무소 소속으로 공모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세종문화회관 주차장 공원화 설계공모’,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 국제 설계공모’,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국제설계공모’, ‘마곡 워터프런트 설계공모’ 등에 참여했죠. 프로젝트 성격에 따른 특성도 배우고, 건축과 토목 등 다른 분야 전문가와 교류하는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제2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인 박경탁 소장(동심원조경)이 ‘제1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수상자였는데, 최영준 소장은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하셨네요.
“제 나름대로 의미가 커요. 환경조경대전은 하나의 관문이었어요. 설계를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장래를 걸 법한 재능이 있는지 판단하고 싶었어요. 그때가 2007년인데 의학전문대학원, 약학전문대학원이 생겨나던 때였거든요. 마침 제가 수학을 좋아하고 잘해서 옆에서 바람을 넣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학원 가서 조금 공부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식의 얘기였죠. 솔직히 순간 흔들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이 공모에서 상을 받으면 평생 조경을 해야지, 밑거름을 다질 겸 유학도 가야지 하고 다짐했죠.”
-객관적 평가를 받아보려던 시기였네요. 각오가 대단했으니 굉장히 열심히 했겠어요. 어떤 작품이었나요?
“졸업반 여름 내내 학교에서 살았어요. 서울에 막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해서 녹지 시스템을 구상했는데, 교통 인프라와 오픈스페이스를 결합한 창의적 시도를 했다는 평을 받았죠. 이후로도 모의고사를 본다는 마음으로 6개월에 한 번씩은 공모에 도전해보려고 했어요.”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설계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유학을 가기도 했죠?
“저 역시 그래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최영준 소장 세대의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본격적 2세대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요.
“21세기의 첫 학번인데, 당시 활발히 일어난 도시 개발과 함께 진행된 수많은 프로젝트를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죠. 아날로그 작업에서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전통적 조경과 차별되는, 도시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조경의 이론적, 실천적 전이가 일어나기도 했죠. 이런 변화를 지켜본 덕분에 폭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만큼 좋은 설계가 무엇인지 더 궁금해졌고요. 폭넓은 경험과 배움을 기대하며 유학길에 올랐다고 볼 수 있겠네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 Upenn)에서 좋은 설계가 무엇인지 답을 구했나요?
“답까지는 구하지 못했지만, 조경 설계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었어요. 대형 신도시를 계획하고, 미시적 생태계의 구성 원리를 이용해 도쿄 만 기반 시설의 미래를 계획하기도 했죠. 순수 기하의 집적을 통해 조직되어 작동하는 옥외 공간의 표면을 만드는 실험적인 설계를 하
기도 했고요. 개념적, 규모적 한계나 문화의 국경 없이 조경 진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적용해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특히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과 교류하다 보니 문화적 지평을 확장할 수 있었어요. 졸업 무렵, 친한 동료들, 또 강사들과 팀을 이뤄 뉴욕의 재개발지를 대상지로 2년마다 신진 건축가를 선정하는 공모전에 참가했어요. 기능을 상실해 방치됐던 뉴욕 브롱크스(Bronx)의 송수교를 생태와 문화의 인프라로 재생시키는 안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대상을 수상하여 신진 건축가의 타이틀도 얻었죠.”
-표정에서 당시의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유학 중 힘든 점은 없었나요?
“물론 고생도 했죠. 특히 첫 학기에 부족함을 많이 느꼈어요. 전투력은 최고였던 시기라 포기할 줄을 몰랐죠. 첫 학기가 끝난 뒤 두세 달 혼자 작업을 더 하기도 했으니까요. 노력한 게 아까워서 당시 수업 교수였던 제임스 코너에게 결과물을 메일로 보내기도 했어요. 답장은 안 왔는데, 6개월 뒤에 뜻하지 않은 연락이 왔죠. 전 세계 건축, 도시, 조경 관련 대학의 졸업 작품 중 학교의 추천을 받은 작품을 2년마다 경쟁시키는 ‘아키프릭스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이라는 공모가 있어요. 그 공모에 유펜 디자인 대학원 대표로 참가하라는 소식이었죠. 본선 최종 결선작으로 선정되어서 캠브리지 MIT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했고, ‘바르셀로나 유럽 조경 비엔날레(European Barcelona Biennial of Landscape Architecture)’에 출품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지네요.
“코펜하겐 북항을 대상지로 한 프로젝트였어요. 녹지와 도시 공간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는데, 도시의 구조와 정체성을 녹지 공간이 주도적으로 끌어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상을 받아서 기뻤다기보다, 설계 과정에서 무척 헤맸던 프로젝트인데 노력하면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고 누군가가 그걸 알아봐 줬다는 게 감사했어요.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오기로 끝까지 파고 파다보면 뭐가 되는구나 생각하게 됐죠. 당시 맥시멀리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가지 작업을 많이 했거든요. 뭐든 적당히 하는 데서 멈추지 못했죠.”
-한계에 그렇게 대처했군요. 파고 파다 보면 결국 물이 나온다는 마음으로, 물이 나올 때까지 팔 각오로.
“요즘엔 몸이 안 따라줘서 못 하고 있지만요.”(웃음) … (중략)
* 환경과조경 393호(2021년 1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