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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금쇄동기』와 걷기의 정원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 환경과조경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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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금쇄동기』. 그가 금쇄동을 발견해 정원으로 조영한 지 1년 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우당

 

『금쇄동기』 이해

『금쇄동기金鎖洞記』는 고산 윤선도가 55세 때 지은 산문이다. 그가 조영한 여러 정원1 가운데 하나인 해남의 금쇄동을 발견하여 정원으로 만들어 즐긴 지 1년 만에 그곳의 풍광과 의미, 그리고 주요 경물에 대해 기술한 수필 형식의 기록이다. 정원에 관한 기록, 특히 작정자가 서술한 정원 관련 기록이 많지 않은 한국 조경사에서 『금쇄동기』는 의미 있는 사료라 할 만하다. 한국 최고의 정원가라 할 수 있는2 고산 자신이 만들어 즐긴 정원에 대해 직접 기술한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3에서 조경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평생을 정치적 역경 속에 살았던 윤선도가 인간적 슬픔과 정치적 쓰라림을 잇달아 겪은 후 마침내 집안일과 제사를 큰 아들에게 맡기고 산속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긴 것은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보길도에 원림을 조영한 지 불과 2년 만에 수정동을 새롭게 찾아내어 본격적으로 산거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보길도 부용동이 바다 한 가운데 있어 오가기가 수월치 않았던 터라 해남 종가에서 가까운 곳에 원림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법하다.4 처음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호남의 명산이라 불리던 병풍산 자락의 작은 계곡 수정동이었다. 그 직후 병풍산 너머 계곡에 문소동을 찾아 자신의 원림 영역을 확장했다가 우연히 맞은편 산 정상부에 있는 금쇄동을 발견하게 된다. 금쇄동金鎖洞(자물쇠가 잠긴 아름다운 궤짝처럼 생긴 곳)이라는 이름은 정상부가 오목하면서 찾아 오르기 힘든 지형적 특성에 무관한 바는 아니지만, 그 곳을 발견하기 며칠 전에 금궤를 발견하는 꿈을 꾼 사실에 직접적으로 연유되었다. 처음 수정동으로 들어간 지 1년 만에 우연히 금쇄동을 발견하여 정원을 만들었고, 다시 1년 후에 그간의 감회를 적은 것이 『금쇄동기』이다. 발견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도 감회가 여전했을 만큼 금쇄동은 고산에게 각별한 곳이었던 것이다. 수정동이나 문소동에 비해 경치가 빼어나고 규모도 커서 금쇄동을 찾아 낸 이후로 고산은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5 『금쇄동기』는 하늘이 준 비처秘處에서 발견한 자연 경물과 몇동의 건물, 그리고 여러 갈래의 길로 정원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고서 쓴 금쇄동 원림 준공기라 할 수 있다. 6


걷기를 전제로 한 정원: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

걷기란 경관 속에서 몸을 이동시키는 일이다. 걷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만나고 풍경을 감상한다. 단어로 글을 써나가듯 우리는 걸음을 통해 공간을 읽는다.7 걷기를 건축의 한 형태로8 간주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인간이 삶을 경험하고 주위 환경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도 걷기를 통해서이며,9 정원에서도 걷기는 감상을 위한 기본 요건이다.10 걷지 않고 탐방할 수 있는 정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존 딕슨 헌트John Dixon Hunt의 말은11 정원에서 걷기의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특별히 걷기가 중시된 정원은 자연형 정원이다. 자연식 정원은 그 안에 “숨겨진 경이를 발로 찾아가 발견해 내기를 기다리는”12 정원이다. 비록 길들여진 곳이기는 하나 경이롭고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정원에 대한 정의는13 이를 잘 설명해준다. 걷기를 통해 주위 자연 경물이나 부단히 변화하는 무언가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자칫 시각에 의존하기 쉬운 정원에서의 감상을 한층 심화시킬 수 있게 된다. 

온 몸을 동원한 걷기를 통해 우리는 시각적 감각 세계 이상과 조우14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수간에 조성된 조선 선비들의 원림에서는 대개 자연 산지 속에 있던 경물이나 자연계의 현상이 감상의 주요소이다. 원래 있던 자연 경물과 현상을 걸어 다니며 발견해내어 정원의 주요소로 편입시키고 걷기를 통해 심미적 만남을 즐기고자 한 것이다.

하루 동안 여덟 개의 산책로를 찾아낸 니체처럼15 고산도 수정동을 중심으로 주변 산길을 두루 찾아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고산이 수정동을 찾아 들어간 그 해에 문소동을,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금쇄동을 찾아내고 정원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 개연성을 잘 드러내 준다. 정원 내의 주요 지점과 경물만을 즐긴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산지까지 두루 찾아 즐긴 것이다. 그가 수정동-문소동-금쇄동으로 자신의 정원을 확장시켜나간 것도 알고 보면 걷기를 통해 새로운 적지를 발견해낸 결과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의 매일 이 정원들을 오가며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쇄동에서 각각 1리(400m)와 5리(2km) 밖에 안 되는 거리인 문소동과 수정동은 반나절 사이에도 오갈 수 있어 거의 매일 오가며 즐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 점에서 수정동, 문소동, 그리고 금쇄동은 걷기에 의한, 걷기를 위한 정원이라 할 만하다. 산지라는 지형 조건은 걷기를 통해서만 극복 가능하다. 정원의 주요 시설을 산꼭대기에 배치한 금쇄동은 산을 오르지 않고는 볼 수조차 없다. 구태여 산꼭대기에 자신의 거처와 정원을 마련한 것은 그곳의 풍광이 마음에 들었던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매일 급경사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으니 풍광의 대가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다. 어쩌면 위태롭고 험난한 산길을 올라야만 비로소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금쇄동은 더욱 각별한 곳일 수도 있다.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을 공부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 조경설계 실무를 하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및 생태디자인, 환경설계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대전세계박람회장, 인사동길, 국립중앙박물관, 신라호텔 전정, 선유도공원, 용산공원, 순천국제정원박람회장 등의 작품과, 『한국의 전통생태학』(2004, 공저), 『LAnD: 조경·미학·디자인』(2006, 공저),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2007, 공저), 『고산 윤선도 원림을 읽다』(2010), 『Historical Studies of Geomancy in Korea』(Cambridge University Press, 근간, 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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