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migration를 하고자 하는 욕구는 더 낫거나 다른 생활 여건에 대한 호기심과 바람에서 비롯된다. 이주는 각기 다른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즉 국제적, 국내적, 혹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전 지구적인 대규모 이주는 이주라는 개념 자체를 심대하게 바꿔놓았는데, UN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한 해 동안 세계적으로 2억3천2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주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2억3천2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삶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적 의미의 이주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상태에 놓여있는데, 이주가 단기적 성격과 장기적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국제 사회 속에서 이주자의 풍습은 더 이상 고향에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국제 항공편과 인터넷을 통해 누구든 손쉽게 고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민자 사회는 이국적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지역성을 역동적으로 창출하게 된다. 이처럼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공공 공간 설계에 있어서도 몇 가지 새로운 고려 사항이 등장하게 된다. 동시대의 다채로운 문화가 서로 만나는 접점으로서 공공공간은 이민자 사회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조경 분야에서 유서 깊은 방법들, 특히 정원 영역의 여러 방식들이 공공 공간 내의 낯선 지역성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데 통찰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주란 일종의 열망할 만한 낙원으로서 향상된 환경을 찾아내려는 인류의 욕망이 물리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에덴동산에 대한 갈망을 통해 인간은 문학, 경관 그리고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화적 양태들을 수세기에 걸쳐 창조해 왔다. 정원은 끊임없이 미지의 낙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종교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간에 정원은 본질적으로 목가적 아름다움, 조화로움, 그리고 행복을 간직한 공간인 것이다. 에덴동산이 그 안에 있는 인간을 보호해주는 낙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벽으로 둘러싸인 전통적인 정원 역시 일종의 낙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정원은 외부 세계로부터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보된 공간인 셈이다. 페르시아지역의 정원들이 이란 고원의 가혹하고 건조한 경관에 대한 대척점으로 개발되었던 것이나, 뉴욕의 복잡한 거리 한복판에 센트럴 파크Central Park가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정원은 언제나 이방인인 것이다.
낙원에 대한 인공적인 개념으로서 정원은 전통적으로 이상화된 현실과 사회적 동기를 구현해 왔다. 사상과 정체성이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된 정원에 있어서 거대한 사회적 변화는 정원의 혁신을 불러오곤 한다. 기하학적인 파르테르 parterre와 가지런한 토피어리가 주를 이루는 바로크식 정원은 엄격한 위계질서 및 절대왕권을 표상하는 반면, 낭만주의 시대의 정원은 격식을 갖추지 않은 식재와 자유분방한 이동 등을 토대로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정원은 사회적 정체성을 간접적으로 반영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