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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시적 공간
  • 김모아 (more-moa@naver.com)
  • 환경과조경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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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쉬운 내 이름은 선생님들의 좋은 표적이었다. 날이 좋은 날에는 좋아서,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와서 이름이 불렸다. 칠판 앞에서 문제를 풀기도 했고, 난해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날도 있었지만, 가장 많이 한 일은 교과서를 읽는 것이었다. 문학보다는 비문학이 읽기 편했다. “이 바보!”느이 집엔 이런 거 없지?” 같은 소설 속 대사를 감정과 사투리를 제대로 살려 읽을 걸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시 읽기 역시 곤혹스러운 일 중 하나였는데, 소설과는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단어와 단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 침묵의 길이가 문제였다. 몇 안 되는 글자를 후루룩 읽어버리려 하면 누가 시를 그렇게 읽냐는 꾸짖음이 돌아왔다. 단어와 문장을 음미할 수 있는 틈, 그 짧은 여유를 두는 일이 뭐 그렇게 민망했는지 애꿎은 내 이름만 원망했었다.

침묵의 힘을 깨닫게 된 건 뜻밖에도 영화 동주’(2015)에서였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쿠미와 마주 앉은 동주는 자신의 시집의 제목을 천천히 발음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 네 어절 사이사이에는 공백의 시간을 대신하는 영상들이 자리한다. 시인으로서 고뇌와 열망, 몽규를 향한 열등감이 빚어낸 동주의 모습들이 하늘, 바람, 별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마지막 단어인 시를 발화하는 순간, 장면은 잠시 프리즈 프레임으로 멈춰서며 침묵을 직설적으로 영상화한다. 신기하게도 그 찰나의 정적이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동주를 보고 나선 종종 눈으로만 읽던 시를 소리 내 읽고 싶어졌다.

독자에게 소개할 만한 조경 작품을 찾다보면 이따금 시적 공간, 문학적 공간이라는 표현을 만난다. 시와 문학,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니 그러한 공간 역시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게시물을 클릭하면 대체로 서정적 분위기가 가득한 사진이 모니터를 채우곤 한다. 좋은 곳도 있고, 마음에 차지 않는 곳도 있다. 그렇게 작품을 뜯어보다 보면 시적 공간, 문학적 공간이라는 표현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럽게 저편으로 잊혀지기 일쑤였다. 이번 호를 준비하며 또 한 번 그러한 표현과 마주했다. “오랜 고목들이 풍성한 녹음을 만들어내고 있어 디테일한 식재 계획보다는 문학적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공간 계획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윤동주 문학동산’, pp.32~39)

사전에서는 시적(문학적)’(문학)의 정취를 가진, 또는 그런 것1이라 정의한다. 즉 시적(문학적) 공간이란 (문학)의 고요한 느낌이나 맛을 느낄 수 있는 공간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이나 맛은 지극히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지만, 그간의 작품 서치 경험에 비추어보면 많은 사람이 간결한 공간에 고즈넉한 자연이 가미된 곳에서 시적 분위기를 느끼는 것 같다. 오래전에 읽었던 건축가 이종건의 글이 생각났다. 그는 시적 공간에서 시에 의한 사물의 의미화 작업은, 짓기 작업에서 사물(의 완성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곧 사물 페티시즘에 대한 경계를 시사한다. 건축가들은 대개 작품의 완성도를 디테일에서 찾는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위한 디테일인지 묻는 일을 종종 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 전통 건축이 보여주는 비정합적이고 느슨한 결구와 기하학적으로 경직되기보다 흐트러진 질서에 기초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2고 말한다. 어쩌면 느슨함, 흐트러짐 등 시가 품고 있는 너그러움이 시적 공간과 맥이 닿아있는 게 아닐까.

우연히도 즐겁게 구독 중인 문학 잡지 릿터Littor8/9월호의 주제가 누가 시를 읽는가였다. 출판인, 작가, 서점 종사자, 유튜버, 동영상 제작자, 뮤지션 등 다양한 분야의 필진과 수기

공모로 참여한 독자의 글이 실렸다. 수 편의 글 중 한 문단이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꿈꾸다 말고 마시는 자리끼처럼 나는 시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악몽과 꿈 사이에 청량한 물을 흐르게 하고, 꿈이 혈관에 스며들게 해서, 그토록 땀 흘리며 삼키던 열도 잠시 내려놓게 하는 것.”3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를 보내고 나니 거짓말처럼 바람에 시원한 기운이 그득하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이번 가을에는 내게도 꿈꾸다 말고 마시는 자리끼 같은 시 한 편과 그와 어울리는 공간 하나가 생겼으면 좋겠다.

 

1. ‘시적’, 네이버 어학사전, 2019826일 접속.

2. 이종건, 시적 공간, 궁리, 2016, pp.119~120.

3. 김겨울, “흐르는 말들”, 릿터8/9월호,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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