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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땅 밑을 걷는 사람들
  • 김모아 (more-moa@naver.com)
  • 환경과조경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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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던 여행지에서의 첫 기념품이 우산이라니. 출발할 때만해도 온화했던 하늘이 두 시간 만에 색을 바꾸었다. 날씨가 약속과 달리 변덕을 부린 건 아니었다. 여행 시작 일주일 전부터 확인한 1월 마지막 날 오사카의 강수 확률은 줄곧 80%를 웃돌았으니까. 20%의 확률을 원망하며 입술을 비죽이는 대신 창에 묻어나는 빗방울을 보며 우산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빗줄기와 싸워가며 커다란 캐리어를 끄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걱정과는 달리 나와 친구들은 꽤 멀끔한 모습으로 호텔 로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듣던 대로 거리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던 덕분이다. 빗물에 쓸려오는 오물은커녕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운동화를 흠뻑 적시는 웅덩이 하나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를 괴롭힌 건 100m마다 한 번꼴로 나타난 횡단보도였다. 좀 걸을 만하면 등장하는 건널목은 다섯 걸음이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짧은 주제에 대기 시간이 제법 길었다. 차라도 많았다면 견딜만했을 텐데, 한적한 도로를 앞에 둔 나는 몸 속 깊숙이 내재된 ‘빨리빨리’ 정신을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깨끗한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숙소 인근이 각종 쇼핑몰과 고층 빌딩이 몰려 있는 업무 지구였는데도 말이다. 간간이 곡예사처럼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에는 자전거 핸들을 쥔 사람들이 빠르게 곁을 스쳐 지날 뿐, 비 오는 일본 도심의 풍경은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처럼 잔잔했다. 다들 고층 빌딩에 갇혀 업무에 시달리고 있구나. 텅 빈 거리의 사정을 어림짐작한 우리는 어쩐지 우쭐한 기분과 짧은 휴가가 곧 끝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바삐 걸음을 옮겼다. 

멋대로 내린 진단이 빗나갔다는 걸 여행 삼 일 차의 저녁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빌딩이 아닌 땅 밑에 숨어 있었다. 타코야키 맛집을 찾겠다고 들어선 지하도, 그곳에 또 다른 일본의 도심이 있었다. 대여섯 개의 지하철 노선이 얽힌 지하도는 극악의 길 찾기 난이도를 자랑하는 부평지하상가와 겨루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복잡했다. 긴장을 잠깐만 풀어도 출구로 인도하는 화살표가 사라지기 일쑤, 가뜩이나 방향 감각이 없는 나는 기진맥진하여 지하도를 빠져나와야 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우리는 지상 대신 지하를 찾았다.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에너지를 길 찾는 데 소모해야 했지만, 지하에는 걸음을 더디게 하는 횡단보도도, 목적지까지의 여정을 길게 만드는 8차선 대로도, 불쑥 끼어들어 우리를 놀라게 하던 바이커도, 내리는 비를 피해 우산을 쓸 필요도 없었다. 지하 곳곳에 숨어있는 맛집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야 너무 지하 도시 탐험에 몰두해있던 게 아닌가 아쉬워졌다. 뒤늦은 여행 일기를 쓰기 위해 더듬거린 기억 속에 지하의 모습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지하상가와 다른가 하면 또 그렇게 다를 것도 없는 지하도를 왜 그렇게도 걸었을까. 땅 밑을 누비느라 놓쳤을 미세 먼지 없이 쾌청한 하늘, 겨울인데도 따끈하게 내려오던 햇빛, 가지런히 선 주택들이 만들어내던 골목 풍경들이 새삼 아까웠다. 

맹추위를 피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캐나다 ‘몬트리올 언더그라운드 시티’, 태양광 집광 시스템으로 식물이 자라는 지하 공원을 조성하는 뉴욕 ‘로우라인 프로젝트’ 등 세계 각지에서 땅 밑의 새로운 도시를 실험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게 지하는 도시의 일부라기보다 잘 만든 쇼핑몰, 혹은 어설프게 지상을 흉내낸 거짓된 공간으로 다가온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시간 감각을 잃게 하는 가상 공간을 닮은 것도 같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의 수상작을 정리하며 문득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국제지명초청 설계공모’『( 환경과조경』 2017년 12월호 참조)의 당선작을 떠올렸다. 지상은 넓게 비우고 지하는 문화·예술 등의 프로그램으로 빼곡히 채운 전략이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대상지의 역사나 주변 맥락을 따져보니 같을 수 없다. 코엑스와 호텔, 업무 시설, 백화점을 주변에 둔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는 광화문광장과는 달리 항상 즐겁고 흥겨운 일이 가득한 곳일테다. 먼 훗날 또다시 촛불집회가 열린 광화문광장을 상상해본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가득한 땅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지하 도시 역시 지상과 결을 같이 하게 될까, 아니면 계속 살아가기 위한 일상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을까. 과연 광화문 광장 지하는 보행 통로를 넘어 하나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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