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들여 채색된 이 그림은 험프리 렙턴(Humphry Repton)(1752~1818)이 영국 노팅엄셔(Nottinghamshire)의 웰벡 영지(Welbeck Estate)의 설계 이전과 이후 모습을 그린 것이다(그림 1). 서양 조경사에서 렙턴은 설계 전후의 경관을 덮개를 이용해 보여주는 테크닉과 높은 완성도의 조경 드로잉을 선보인 조경가로 소개된다. 그는 최초의 전문 정원가(landscape gardener)로 평가되기도 한다. 가로로 긴 파노라마 형식의 이 드로잉에서 렙턴은 양쪽 전경에 잎이 풍성한 교목으로 화면 전체의 프레임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고, 그 사이로 넓은 영지의 모습이 점점 후퇴하는 것처럼 묘사해 그림에 깊이감을 부여했다. 중앙에는 자신의 장기인 덮개를 설치해 설계 이전과 이후의 변화된 경관의 모습을 극적으로 연출했다.
흥미로운 건 드로잉의 주제인 경관의 개선보다 드로잉 앞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오른편에 위치한 활엽 교목 한 그루 아래에 두 쌍의 인물이 있다. 왼편에는 토지 측량 기구를 든 사람이 그의 조수와 함께 토지를 측량하고, 그 반대편에는 또 다른 신사가 그의 조수와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가까스로 덮개에 가려지지 않도록 신중히 배치되어 설계 전후의 장면에 동시에 등장하도록 연출되어 있다. 렙턴은 왜 두 쌍의 사람들을 그림 전경에 그려 넣었을까. 보통 조경 설계 드로잉에는 설계된 경관의 이용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하게 그 경관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배치하기 마련이다. 렙턴이 경관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측량하고 스케치하는 사람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조경가는 그리면서 설계한다
질문에 답하기 전에, 조경에서 드로잉이 중요한 이유를 우선 이야기해 보자. 조경학과에 들어와 본격적인 설계보다 먼저 배우는 건 드로잉이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혹은 조경학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서 “조경을 하려면 그림을 잘 그려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조경 설계를 잘하는 것은 아니며, 조경을 하기 위해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조경은 경관을 조성하는 것이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조경 설계 과정에서 드로잉은 반드시 포함되고 또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 경관을 설계하고 조성하기 전에 설계가의 머릿속에 설계된 경관은 오로지 드로잉의 형태로 물질화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선택이라기보다 필연인 셈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9호(2019년 1월호) 수록본 일부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 비평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 설계 실무와 교육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양상, 조경 아카이브 구축,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가천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조경비평 봄’과 ‘조경연구회 보라(BoLA)’의 회원으로도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