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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지사(地史)를 돌보고 가꾸는 조경가
  • 환경과조경 2024년 4월

한국 조경 50년사를 대표하는 1세대 조경가 정영선. 그의 삶과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회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식목일부터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4월 17일에는 그의 조경관을 담은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가 극장 개봉한다. 세계조경가협회IFLA 제프리 젤리코 상을 받은 지난해에 이어 2024년은 가히 정영선의 해라고 할 만하다.

 

지난 50년간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의 손을 거친 작품은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개인과 기업의 정원, 도시 가로와 광장, 근린공원, 기념공원, 생태공원,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 선형 공원, 묘역, 병원, 오피스, 상업시설, 복합문화공간, 공동주택단지, 공장, 캠퍼스, 종교시설과 단지, 테마파크, 리조트, 하천. 그가 다룬 프로젝트의 유형은 조경 직능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 자체를 예시한다. 이 방대한 작업을 관통하는 ‘정영선 조경’ 고유의 특징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자연스러움’,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 ‘한국적 풍경’ 같은 형용어로 그 특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정영선 조경 특유의 미감을 낳는 설계의 기반은 땅의 시간과 이야기를 읽어내고 주변 경관과 관계 맺는 태도다. 그의 작품은 즉물적이고 감각적이지만 그가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는 방식은 관념적이고 이론적이다. 정영선의 글과 말에서 그의 태도를 대변하는 개념을 단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지사(地史)”를 택할 것이다. 그는 ‘지사’란 지형, 지질, 토양, 인문, 사회, 역사, 문화 등을 포괄하는 시공간적 맥락을 뜻한다고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정영선은 매우 간명하게 조경의 직능을 정의한다. “조경가는 연결사”다. 지사, 즉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독해해 설계의 조건과 연결하는 태도가 그의 작업을 가로지른다. 지사를 잇고 엮는 태도를 담은 그의 문장 몇 구절을 옮긴다. “우리가 다루는 대지[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절대 독립되지 않고 시‧공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조경이라는 작업[에서는] …… 관계를 다듬고 설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경관은] 글자의 선택과 배열, 호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시’처럼 세심하게 다뤄져야 한다.”

 

지사를 돌보고 가꾸는 정영선의 설계는 대표작인 희원과 선유도공원을 비롯한 여러 작업에 구현되었지만,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오설록 티뮤지엄(+이니스프리 제주 하우스)일 것이다. 제주도의 필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오설록 티뮤지엄은 아모레퍼시픽이 1983년부터 일궈온 차나무 재배지인 서광다원 한구석에 있다. 24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차밭은 불모의 황무지인 곶자왈을 개간해낸 역동적인 생산 경관이다. 곶자왈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돌과 자갈이 덮여 있어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가시덤불과 양치류가 얼크러져 정글처럼 빽빽한 제주도 특유의 야생 숲이다. 정영선과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은 오설록 티뮤지엄의 새 경관을 직조하면서 건물에 맞붙은 거친 곶자왈 숲의 지형과 수목, 돌과 풀을 그대로 받아들여 재해석했다. 제주 중산간 저지대 고유의 ‘지사’가 쌓인 곶자왈의 원풍경을 돌보고 가꿔 장쾌한 녹차밭 경관의 지사와 연결한 것이다. 오설록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다. 함께 작업해온 건축가 조민석(매스스터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둑알을 하나씩 놓아 바둑판 위에 ‘집’을 키우듯 …… 환경과의 관계성을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확장해나가는 느리고 섬세한 과정이었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한 원로 조경가의 회고전이 아니다. 조경설계를 개척하고 이끌어온 한 개인의 업적뿐 아니라 한국 조경 50년의 성장사와 그 이면을 새롭게 읽을 수 있다. 다음 50년의 좌표를 질문하고 설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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