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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당신의 사물들
  • 환경과조경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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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외 48인 | 한겨레출판 | 2015

 

 

“질문 하나. 그것은 내가 걸을 때 함께 걸으며, 내가 멈추면 함께 멈춘다. 그것은 여행의 친구이며, 카메라와 어울리고, 빛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내게는 콤플렉스다. 질문 둘. 또 다른 그것은 무언가를 바로 잡고, 매끄럽게 하며, 살을 붙인다. 그것은 두근두근 긴장감의 시작이자 마침표이며, 울분과 짜증 유발자이다가 어느 순간 작은 희열을 안겨주며 제 할 일을 마친다. 그리고 내게는 일용할 양식이다.”

 

남자 K는 내가 던진 두 가지 질문에 5분 만에 답을 올렸다. 1번은 담배, 2번은 펜이라면서. 1분 후 S는 선글라스와 키보드(혹은 펜)라는 답을 올리며 확신에 찬 어투로 덧붙였다. “내가 둘 다 맞췄지!” 함께 차를 타고 오던 여자 K와 P는 둘이서 상의를 했다며 역시 선글라스와 펜이란 답을 주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L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그는 책상 우측의 진열대에 놓여 있는 20여개의 유리병 중에서 수십 자루의 검정색 빅Bic 볼펜이 담겨 있는 투명한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빅 볼펜만 사용했다고 한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땐, 볼펜들이 너무 깨끗해서 새것을 모아 놓은 줄로만 알았다. 유리병의 진공 기능 때문일까? ‘수십만이 넘는 글자, 어쩌면 수백만에 육박하는 점과 선과 면의 기억이 그 유리병에 박제’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 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였다(유성 볼펜의 수명은 약 1,000에서 1,500m 정도다). 그와 마주했을 때에는 ‘디자이너는 역시 예민한 존재들’이란 생각만 얼핏 했었다. 그는 요즘엔 폴 스미스Paul Smith 볼펜으로 갈아탔다며 한참 동안 자신의 도구에 대한 추억을 풀어 놓았다.

 

그렇게 『당신의 사물들』에 대한 독회는 각자의 ‘나의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두 명의 K와 S, L, P 그리고 나는 한 손에는 『당신의 사물들』을 들고, 머릿속에는 나만의 사물 두 가지에 대한 추억을 담은 채 L의 사무실에 모였다. 빅 볼펜으로 꽉 채워진 유리병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수집벽으로 이어졌다. 여자 K는 빈 상자로만 집 안의 벽 한 면을 채워놓았다고 한다. 쓸모를 다한 ‘빈’ 상자가 서로 어울려 무언가 새로운 패턴을 구축하는 걸 바라보는 것이, 그저 즐겁단다. 아마도 새로운 상자가 들어오면 기존의 상자 중 어떤 것은 빠져나가거나 새로운 위치를 부여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패턴의 조합이 탄생할 테고. 나로선 상상하지 못한 취미(?) 활동이다. 그녀의 또 다른 수집벽은 다 쓴 몽당 색연필 모으기로 밝혀졌다. 설계를 처음 시작한 대학교 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 수백 자루가 넘어서 세 박스를 빼곡 채우고 있다며, 증거 사진을 내보였다. 마음이 짠했던 대목은, 어느 순간부터 몽당 색연필 박스가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다는 ‘고백’이었다. 설계 도구와 환경이 달라진 탓이다. 아날로그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몽당 색연필 모으기라는 수집벽을 방해했다는 죄로, 우리 일동은 제도판과 결별한 설계 환경을 구박했다. 다양한 스케일의 빵빵이에 대한 추억이 양념으로 곁들여졌고, 그녀가 선호하는 색연필 브랜드가 프리즈마Prisma임도 드러났다.

 

나는 선호하는 문구 브랜드가 있었던가? 두 번째 독회 모임을 시작하며, 여자 시인 49명이 함께 쓴 『당신의 사물들』을 읽은 후 각자의 사물들을 두 가지씩 꼽아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사물? 내 인생의 사물? 가장 기억에 남는 사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물?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물?’ 아마 이 책의 글쓴이 49명도 편집부의 기획 의도를 처음 들었을 때,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앞서 이야기한 빅 볼펜이나 유리병, 상자나 몽당 색연필처럼 사물과 수집벽은 제법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렇다면 수집벽과 무관하면서 내게 유의미한 사물은 무엇이 있을까? 아련한 추억, 강렬한 집착, 씁쓸한 기억, 소중한 소유, 색다른 경험을 동반한 사물들도 있을 것이다. 약과 베개를 꼽은 P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복숭아 씨앗 베개라는 신문물을 우리에게 전파했다. 베기만 해도 머리가 시원해지는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임상 증언과 함께. 도장과 함께 통상적으로 사물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사무실을 꼽은 남자 K도 ‘소중함’과 ‘사물’이 왜 자연스럽게 켤레 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건 S의 아빠의 일기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가 아닌 아빠의 유품인 일기장이 담겨있는 보자기를 풀지 못하고 있다며,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의 정조는 『당신의 사물들』에서 아버지의 숟가락을 떠올린 김소연 시인의 그것과 닿아 있다.

 

‘사물거리다’라는 동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 그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아리송한 것이 눈앞에 떠올라 자꾸 아른거리다’이다. 당신에게는 자꾸만 떠올라 아른거리는 그 무엇이 있는가? 『당신의 사물들』은 바로 그 사물들의 존재를 곱씹게 해준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이었다. 특히 맨 앞에 실려 있는 허수경 시인의 ‘손삽’만으로도 책값 12,000원의 보상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그녀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손에 들면 딱 적당한 삽 하나. 늘 꽃삽이라고 불렀다.”

첫머리에서 던진 두 가지 질문은 내가 고른 두 개의 사물에 대한 힌트였다. 그들과 그녀들의 답은 절반만 맞았다. 첫 번째는 모두의 예상대로 선글라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나는 선글라스 없이 사진 찍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콤플렉스를 가려주는 선글라스는 그래서 내게 더없이 소중한 사물이다. 두 번째는 펜은 펜인데, 빨간펜이다. 이십대 후반 이후로 교정, 교열, 윤문을 보는 내 손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사물이다. 심 굵기가 0.5, 0.7, 1.0 등 각기 다른 수성 볼펜과 유성 볼펜은 물론이고 젤리펜과 플러스펜까지 대여섯 종류의 빨간펜이 손과 가장 가까운 곳에 늘놓여 있다. 나름 각각의 쓰임도 따로 있다. 색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빨간펜만은 입사 이후 언제나 내가 문방구에서 구입해 썼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다음 독회할 책은 S가 추천한 『반란의 도시』다. 이제 ‘나만의 도시는 어디일까?’란 숙제를 풀어야 할 차례다. S가 애착을 넘어 집착하는 손톱깎이란 사물을 도시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녹여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은,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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