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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젖은 광장, 마른광장
  • 환경과조경 2017년 3월

지난 해 12월 9일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핑계 삼아 다음날 새벽까지 통음했다. 오후에야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찾아간 미용실. 머리를 다듬던 원장이 말했다. “오늘은 우리 꼬맹이들 데리고 가려고요.” 지난 6주 동안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토요일마다 촛불을 들었다. 8시가 넘어서야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서둘러 광장으로 달려가 자정 넘어서까지 거리를 지켰다. “하도 구호를 외쳐서 목이 터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내 직업이 정치 뉴스를 다루는 것임을 알면서도, 원장은 나를 단골로 대한 지난 8년 동안 한 번도 정치 얘기를 건넨 적이 없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232만 명’이라는 경이로운 숫자가 탄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내가 경험했던 광장은 잠깐 타오르다 달콤한 케이크 위로 녹아버리는 막대 촛불 같은 것이었다. 2008년 봄 광화문광장. 그 전해 말 531만의 큰 표 차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금세 촛불의 성난 함성에 부닥쳤다. 그러나 거세게 타올랐던 촛불은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시작 일인 6월 10일을 기점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청와대 뒷산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이후 이내 잦아들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이 다소 까다로워졌고 ‘한반도 대운하’가 ‘4대강’으로 바뀌었지만, 근본적으론 변한 건 없었다.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사찰·검거가 이어졌고, 검찰의 가혹한 망신 주기 수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4년 뒤인 2012년엔 이번 겨울 수백만 명을 거리로 내몬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다.

 

뿐만인가. 2014년의 광장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나.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가슴깊이 아파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왔다 간 광화문광장에선 유가족을 능멸하는 행위가 자행됐다. 단식 농성을 하는 가족들 곁에서 ‘자장면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슬픔과 공감이 있던 자리엔 진영 논리가 횡행했다. 광장에서 튄 분노의 불꽃은 이내 마른 장작처럼 화다닥 탄 뒤 한줌 재로 스러졌다. 마른 광장은 희망을 잠시 조우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광장은 달랐다. 마음에 차오른 물기. 그건 나만이 느낀 게 아니었을 게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느낀 따뜻함 밑바닥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소리친 광장엔 울분과 통한이 서려 있었다. 광장은 축축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던 2014년 당시, 나는 매일 국회로 출근해 하루 종일 정치인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취재하는 일을 했다. 흔히들, 갈등은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갈등을 표출하고 사회화 하는 과정이 바로 정치”(샤츠 슈나이더)라는 관점이다.

 

이 경우 정치는 밀실의 개인들을 불러내 자신의 목소리를 분출하도록 하는 광장이다. 그러나 유족들에게 한국의 정치는 광장이 아니었다. 같은 해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쥔 여권은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지배적 사회 갈등’이었던 세월호 문제의 본질을, 자신들의 존립에 유리한 갈등, 즉 ‘색깔론’으로 대체했다. 야당은 당내 분열과 실력 부족으로 여권의 이런 행태를 제어할 수 없었다. 도무지 좌우를 따질 일이 아닌 사회적 대참사가 정쟁으로 전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족들은 보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탐욕스런 집단으로, 좌파와 결합한 불온한 세력으로 몰렸다. 유족들은 밀실에 갇혔다. 지난 해 4·13 총선 때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자 유족들은 도라에몽 인형 탈을 쓰고 선거 운동을 했다. ‘세월호 유족’이 공공연히 나섰다가 표 떨어질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유족들은 ‘투표로 아이들의 미래를 바꿉시다’라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주장을 펼칠 때조차 인형 탈 뒤로 숨어야 했다.

 

올 겨울 광장. 시민들은 진실의 외침을 다시 응시했다. 밀실에 유폐됐던 진상 규명의 호소를 응원했다. 촛불이 밝혀지기 시작하던 11월 초까지만 해도 광장 한편에서 쭈뼛거렸던 유족들은 날로 탄핵의 열기가 고조되자 전면에 나섰다. 11월 28일엔 노란 종이배 304개를 태운 ‘세월호 고래’ 풍선과 함께 청와대 앞까지 행진을 벌였다. 2014년 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앞에서 무릎 꿇고 빌기까지 했던 창현이 아빠 이남석 씨는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광화문에서 청와대까지 갔던 날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달라’며 1000일 가까이 바쳤던 간절한 기도가 드디어 응답 받았다고 생각했다.”

 

올 겨울 광장. 수백만 명이 모였는데도 질서와 평화가 유지된 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이 쓰는 ‘시민의식의 성숙’이란 ‘중립적’ 표현은 이 광장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인내와 절제, 그 밑에 자리한 것은 304명을 떠나 보낸 우리들의 눈물이었다. 광장은 젖어 있었다.


이유주현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년을 살았다. 1997년 「한겨레」 신문에 입사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등을 거쳐 왔다. 한때 조경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일과 일 아닌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보려고 하면서도 늘 휘청거리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이 멋지게 잡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저로 『소울 플레이스』, 『공원을 읽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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