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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풍경의 귀환
  • 환경과조경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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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흔적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 뒤스부르크-노르트

 

#27

산업 자연의 낭만 - 엠셔 지방의 풍경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이 후속편으로 연작 ‘호빗’을 만들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호빗족의 빌보배긴스는 키 작은 종족 드베르그들과 함께 모험을 떠난다. 무시무시한 용 스마우그에게 빼앗긴 보물을 찾기 위해 지하 왕국에 잠입한다는 이야기다. 드베르그족이 건설한 지하 왕국의 엄청난 부는 그들이 캐내는 지하자원에서 유래한다.

바그너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반지와 라인 강의 보물을 만든 장인 알베리히 역시 몸집은 작지만 힘세며 재주가 뛰어난 종족, ‘니벨룽겐’에 속한다. 백설공주 동화에 등장하는 난쟁이들 역시 광산에서 일했다. 이렇듯 유럽 신화에서 키 작은 종족 혹은 난쟁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이들은 인류의 광산자원 이용의 역사를 미화한 것에서 유래한다. 땅을 파고 들어가 어두운 곳에서 살며 금과 은, 구리, 철, 석탄을 캐내어 인류 문명을 번성케 한 무리들. 힘들게 캐낸 시커먼 흙더미와 돌덩어리에서 빛나는 금관을 만들어 왕의 머리를 장식하고, 철을 연마해 무기를 만들어 무사의 손에 쥐여준 장본인들. 이들은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다만 오랜 지하의 삶으로 어느새 모습이 바뀌고 허리가 굽어 난쟁이가 되었고, 그로 인해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라인 강과도 관련이 깊다. 전설 속에서는 라인 강바닥에 깊이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보물을 만들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소위 ‘라인 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으로서 루르 지방의 도시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라인강이 모든 공적을 혼자 차지하긴 했지만 사실 라인 강과 라인 강의 지류인 엠셔Emscher 강 사이에 있는 철광과 탄광지대가 독일 경제 부흥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이 지역이 바로 루르Ruhr 지방이다. 엠셔 강가에서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연명하던 작은 마을들이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철강 산업과 철도 사업의 붐을 타고 수십 년 사이에 산업 도시로 급성장했다. 뒤스부르크, 에센, 보쿰, 도르트문트 등 널리 알려진 산업 도시들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성장이 빨랐던 만큼 하강세도 빨랐다. 1950년대 말에 시작된 석탄 위기로 탄광들이 하나 둘 폐쇄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은 1980년대까지 유지되었으나 그 역시 산업 구조의 변화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철광과 탄광은 1980년대에 거의 폐쇄되었고 철강 산업 역시 해외로 옮겨가면서 수십 개의 산업체가 문을 닫고 환경 잔해로 남게 되었다.

약 백 년간에 걸친 집중적인 산업 이용으로 루르 지방의 자연 경관은 문자 그대로 안팎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대지진이 지나간 자리처럼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한때 농경문화 경관이 지배하던 곳에 하늘을 찌르는 높은 굴뚝의 스카이라인이 들어섰고, 수십 미터 높이의 산업 건축물과 함께 수백 개의 구덩이와 산이 새로 생겼다. 하천은 더 이상 경관을 적시는 생명줄이 아니었다. 오히려 썩은 물을 흘려보내 자연을 병들게 했다. 루르 지방은 이제 총 800km2의 면적, 즉 서울, 수원, 안양을 합친 것보다 조금 더 큰 면적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의 죽어가는 경관을 재생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루르 지방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모이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의 후원을 받아 1989년 4월 1일 엠셔 지방 재생 사업이 발족되었다. 엠셔 지방 재생 사업은 다른 이름으로 ‘세계 건설 박람회 엠셔 파크IBA Emscher Park’라고 불린다. 엠셔 지방 전체가 곧 박람회장이다. 17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참여해 총 120개의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이와 병행하여 기형이 되어 버린 엠셔의 풍경을 서로 연결해 거대한 엠셔 랜드스케이프 파크Emscher Landschaftspark를 조성했다. 엠셔 랜드스케이프 파크는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이십여 개의 지역 공원과 정원을 서로 연결한 공원 네트워크다. 엠셔 재생 사업은 1999년까지 십 년에 걸쳐 재생 사업의 과정과 절차를 세상에 공개하고 많은 토론을 유도해 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완성되었고 널리 알려진 공원이 ‘뒤스부르크-노르트Duisburg-Nord’다. 뒤스부르크-노르트는 피터 라츠Peter Latz라는 조경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 루르 지방의 시급한 과제는 피터 라츠라는 훌륭한 조경가를 낳았다. 그는 지나간 흔적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시간을 두고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라츠는 마스터플랜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마스터플랜은 자연이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1 라츠가 한 일은 우선 폐허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이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의 경관적 잠재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마치 고고학자가 켜켜이 쌓인 유적을 하나씩 들어내듯 그는 산업 폐허의 성격을 분류해냈고 이름을 붙였다.2 썩은 물이 흐르는 배수로와 하수 처리 시설을 합하니 미래의 수 경관이 보였다. 사내 철도 시설이 레일 공원이 되었으며 각종 산업 도로망과 교량을 연결하니 하염없이 긴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되었다. 건물을 그대로 두고 이를 전시장, 공연장으로 명명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 자연’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산업 자연은 단순히 산업 시설의 잔재나 지형 변화로 만들어진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 이용으로 인해 더 심각한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지표면의 화학적 성질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결과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자연’이 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실제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동식물이 서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앞으로도 인류는 자연을 화학적으로 변형시켜 더 많은 산업 자연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2009년 뮌헨 공과대학 조경학과에 ‘산업 경관과 조경’이라는 학과가 신설되었다.3 엠셔의 풍경처럼 시간이 만들어 놓은 마스터플랜으로 되돌아올 산업 자연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까.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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