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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루이 비네쉬
루이 비네쉬 페이자지스트 대표
  • 최이규
  • 환경과조경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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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설계에 문외한이 아니더라도, 베르사유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파리 근교, 조그만 전원 마을인 베르사유에 도착하면 그 한가한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생경하게 서 있는 궁전과 정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입장 차례를 기다리는 과정은 인내심을 요하고, 마리앙투아네트의 궁정 생활에 대한 몽환적 상상은 까다로운 관람 규정으로 증발되어 버린다. 화려하지만 구석구석 슬픔이 배어있는 금빛 가득한 방들을 지나 드디어 만나게 되는 정원 또한 기대만큼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다. 항공사진으로만 보던 회화적인 자수 화단도 발치 가까이에 놓여있으니 그리 대단하지도 않고 조금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저 커다랗기만 한 분수들은 영광스럽기보다는 낡아서 안쓰럽고 황량한 느낌이다. 이곳에서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은 회색빛 허공을 배회하는 프랑스의 햇빛이다.

휴먼 스케일을 넘어 극단적으로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베르사유의 공간 구성은 자연을 인간의 통치 아래로 복속하려는 어리석고 실패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껏 부풀었던 기대와 달리 사뭇 실망스럽다. 화려하지만 애정 어린 손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차가운 공간에서 살아야만 했던 프랑스 왕족들의 광기도 사뭇이해할 만하다. 북악과 인왕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우리 궁궐 정원의 자연스럽고 간결한 아름다움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정원이 그렇듯, 위대한 정원이란 당대의 시대상을 아낌없이 구현하는 공간이다. 베르사유는 17세기 절대 왕정의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프랑스의 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한다. 그중에서도 정원은 그저건물의 배경이 아니라 공간 계획의 핵심이었다. ‘루이 14세’라는 인물을 고려하지 않고 형태적인 측면에서만 베르사유를 분석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상당한 착오를 낳는다. 베르사유는 단순히 당시에 축적된 잉여적 부를 과시하는 궁궐과 정원 프로젝트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과 근거를 두고 진행한 프랑스식 행정 복합 신도시였기 때문이다. 종종 오해받는 것처럼 베르사유는 프랑스 왕가의 별장이 아니다. 루이 14세는 왕정의 통치 체제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 사회와 관료 집단을 루브르에서 베르사유로 옮겨왔다. 베르사유에는 그가 꿈꾸던 ‘새로운 국가, 프랑스’에 대한 신념과 중앙집권적 표상, 무엇보다도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사상이 담겨 있다. 17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의 문화적 중심은 이탈리아였다.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부와 군사력을 보유한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루이는 프랑스의 패션과 예술, 건축을 보호하고 장려해 독자적인 문화적 전통을 구축하려 했고 베르사유는 그 전적인 수단이었다.

건축사가 빈센트 스컬리Vincent Scully가 지적했듯, 경사와 비탈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이탈리아 정원과 달리 베르사유는 일드 프랑스Ile-de-France의 대평원에 건설된 프랑스식 정원이다. 또한 평생을 영토 확장과 전쟁으로 보낸 루이의 자랑스러운 군대와 프랑스 영토를 표현한 추상화이며,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순수한 르네상스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앙드레 르노트르André Le Nôtre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다. 절반을 차지하는 하늘 또한 르 노트르가 의도한 바였다. 망사르Jules Hardouin-M. Mansart의 ‘거울의 방’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루이 14세의 상징성을 표현한 것처럼 태양을 자처했던 루이 14세가 깃들 수 있는 끝없는 하늘과 무한히 뻗은 지평선의 정원은 더없이 어울리는 설계였다.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는 계획의 성격 또한 자신에 대한 초월적 기준을 세우고 왕으로서 초인적 면모를 구축하려 했던 루이의 의지가 정확히 반영된 결과였다. 루이는 매일 세 차례의 사냥, 세 차례의 관료회의, 세 차례의 성관계를 철칙으로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베르사유 또한 그가 새롭게 이룩하려 한 프랑스적 격식과 이지적이고 복잡한 문화 예식의 3차원적 구현이었다. 다시 말해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국가적 기강과 문화적 기풍을 다시 세우는 사업이었다. 베르사유의 입구인 군사 광장Place d’rmes에는 세종대왕이나 링컨처럼 옥좌에 앉은 통치자가 아니라 말을 타고 돌격을 외치는 루이의 기마상이 서있다.

베르사유는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현대적 개발 방식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꿈을 실현할 중앙 정치 무대가 되어야 했기에 늪지대가 아름다운 숲과 정원으로 바뀔 때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기다릴 수 없었다. 루이는 빠른 결과를 원했으며, 르 노트르는 프랑스 전 국토에서 장대한 수목을 구해 성목을 이식함으로써 깜짝 놀랄만한 경관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베르사유는 빠르게 건설되었고 또 빠르게 파괴되었다. 프랑스혁명의 혼란을 거치며 황폐화의 길을 걷던 정원은 근 200년간 복원의 대상이었다. 루이 14세와 르 노트르가 세웠던 비전을 해석하고 이상적 상태를 회복하는 일이 베르사유의 임무로 전승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관점에 변화가 시작됐다. 폭풍 피해로 훼손된 ‘물의 극장이 있는 숲Le Bosquet du Théâtre d’au’ 정원의 재조성 과정에서 원형중심의 역사적 복원이 아니라 베르사유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도입한 것이다. 이 역사적인 과업을 맡은 조경가가 프랑스의 정원사, 루이 비네쉬다.

역사와 전통의 층이 겹겹이 축적된 베르사유를 해석하고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정원에 담는 작업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내년 봄에 선보일 비네쉬의 정원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 무척 궁금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작품 또한 베르사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해석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엄격한 격식과 초월적 이상을 표현한 베르사유의 중앙 축과 대비되는 숲속 정원들은 파티와 공연의 무대가 된 그야말로 자유와 환상의 세계였다.

2011년 공모전에 당선된 비네쉬가 1674년 르 노트르가 설계한 물의 극장을 재조성하게 되었다. 루이 비네쉬는 법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묘목장의 견습생으로 다시 출발하며 정원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프랑스 곳곳의 대규모 저택 정원과 성채, 전통 경관을 디자인하며 르 노트르 이후 베르사유 최초의 독창적 정원을 선보일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1990년대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비네쉬는 서울의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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