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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파괴와 전략적 버리기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 환경과조경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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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빙 시장은 더 작은 디트로이트를 만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2010년 3천여 채의 집을 허문다. ⓒHaeyoun Park, “Steps Toward a Smaller Detroit”, The New York Times , April 5, 2011

 

창조와 파괴만큼 도시·조경설계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란을 일으키는 행위도 드물다. 도시 자체가 크고 작은 창조와 발명의 결과다. 19세기 중반 바르셀로나에 도시 격자를 카펫처럼 덮은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 그리고 비슷한 시기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에서 프랭클린 파크Franklin Park에 이르기까지 7마일에 달하는 에메랄드 네클리스Emerald Necklace를 도시에 선사한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이들은 아름다운 흔적을 도시에 남긴 창조자들이다. 이들은 종종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계획가이자 용감한 개척자로 대접받는다. 그에 비해 파괴는 도시의 일부를 없애거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작업이다. 도시를 파괴한 사람은 때로는 도시 문명의 적 혹은 몰지각한 불도저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이렇게 전혀 반대되는 의미의 두 단어를 결합한 개념인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최근 도시계획 분야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다.

1940년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된 이 말은 최근 뉴욕타임즈 지에 따르면 시애틀, LA, 디트로이트 등의 도시를 쇠퇴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1 창조적 파괴는 흔히 기존 환경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식의 지나친 단순화를 통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이 자주 인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도시 쇠퇴 과정이 성장과 발전의 정반대가 아니며 가능하면 피해야 할 절대악도 아니라고 보는 신선함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 시기에 만들어진 도시의 부분이 가까운 미래에 필요한 기능이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점차 교체되어야 하며, 현재 세계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쇠퇴decline가 바로 그 파괴와 교체 과정의 생산적 준비단계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최근의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잘 나타난다.

다음은 디트로이트의 다소 불명예스러운 통계 중 일부이다.


•미국 역사상 파산한 도시 중 가장 큰 도시(2013년 7월 파산 신청)

•도시 총 부채 약 18조5천억 원(인구 1인당 약 3천만 원의 부채)

•1950년대 180만 인구에서 2014년 70만 인구로 감소•남은 인구의 약 82%가 고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

•최소 약 4만 채의 집이 즉시 철거 대상으로 지정됨: 총 건축물의 30%가 극도로 열악함 혹은 빈집

•시 전체 가로등 약 8만8천 개 중 3만5천 개만 작동

•단위 인구 당 살인 사건 발생률 뉴욕 시의 11배


1900년대 초 미국의 실리콘밸리,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빅3, 즉 포드Ford, GMGeneral Motors, 크라이슬러Chrysler가 가져온 자동차 상업화 및 대중화의 진원지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이 이루어지기 전 이미 운하와 철도가 지나가는 물류 거점이자 내륙 워터프런트를 활용한 선박 제조 기지로 자리매김하며 1890년 약 21만 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3 당시의 디트로이트는 모험가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는 1900년대 판 실리콘밸리였다. 흔히 ‘포디즘Fordism 자본주의’나 영국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혹은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된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가 이 시기 디트로이트에 등장한다. 1903년 포드사를 설립한 그는 1906년 ‘Model N’의 상업적 성공을 토대로 대량 생산 시스템을 적용해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춘 ‘Model T’로 자동차 대중화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이 도시는 몇몇 성공한 기업가들의 독무대는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 열정적인 소자본 창업가, 그리고 이들의 혁신을 지원하는 수많은 창업 인큐베이터와 경쟁력 있는 컨설턴트들이 당시의 디트로이트를 담금질했다. 1901년 자체적으로 자동차 부품 워크숍을 설립하고 포드사에 자금을 조달한 닷지 브라더스Dodge Brothers를 포함해 1908년 GM, 1925년 크라이슬러 등이 혁신의 도시 디트로이트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1850~1890년 10배 가까이 증가한 도시 인구는 다시 1890~1950년 8배 이상 늘어났다.


1950~2013년: 산업 쇠퇴, 악마의 밤, 그리고 파산 선고

그러나 195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이 혁신 도시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국내외 자동차 산업 간의 과도한 경쟁, 1950년대 본격화된 백인 중산층의 대규모 교외 이주, 1960년대 불거진 사회 불안과 폭동, 1973~1974년 석유 파동 등의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 디트로이트 빅3는 시설 투자의 방향을 급선회한다. 1947~1958년 신규 자동차 공장 25개를 전통적으로 혁신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 도심부가 아닌 교외 지역의 저렴하고 넓은 토지에 설립한다.4

게다가 자동차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산업이나 서비스를 도입해 변신에 성공한 뉴욕이나 보스턴과는 달리 디트로이트의 도심부는 제2, 제3의 신산업 유치에 실패하고 만다. 이곳은 더 가난하고, 더 분노에 찬, 그리고 혁신의 감각을 망각한 흑인 커뮤니티로 가득 차게 된다.5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집단적 의식처럼 번진 ‘악마의 밤Devil’ Night’은 매년 수백 가구의 방화 피해와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디트로이트는 계속된 산업 쇠퇴와 사회 불안, 정부 부채 누적으로 결국 2013년 7월 공식적으로 파산 선고를 하게 된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과 협동과정 도시설계학전공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중국·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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