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파올로 뷔르기
  • 최이규
  • 환경과조경 2015년 3월

그림33.png

 

이탈리아와 맞닿은 스위스 남단의 작은 도시 카모리노Camorino에는 커다란 유리 온실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뷔르기 스튜디오가 있다. 넓은 잎을 드리운 열대 식물 사이로 띄엄띄엄 놓인 큰 테이블, 햇빛이 살랑거리는 나무 그늘 아래 회의를 여는 모습이 이채롭다. 부인이 운영하는 시공 회사도 함께 입주했다. 디자인-빌드형태로 작업해 온 탓인지, 파올로 뷔르기 프로젝트의 눈에 띄는 특징은 우선 단단한 완성도다. 간략하게 정제된 형태에도 불구하고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풍부한 미니멀리즘’으로 요약될 수 있는 모더니즘적 장인정신 덕분일 것이다. 나아가 파올로 뷔르기의 작업이 평범한 미니멀리즘에 비해 탁월한 이유는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강한 지역성 또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과 지역성이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만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억지스럽지 않은 무위無爲의 디자인’, ‘대상지의 핵심적 가치에 집중한 깊이’,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기보다는 그 너머의 무엇을 상상하게 하는 미스터리한 공간’. 그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체험할 수 있는 짧은 감상평이다. 험준하고 압도적인 스위스의 경관 덕분일까? 주위 환경에 딱 들어맞게 설계한 그의 프로젝트에서 느껴지는 대상지에 대한 깊은 존중은 종교적인 수준이라 할 만하다.

 

그가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이 색채를 통해 빛을 매만졌다면, 뷔르기는 소재의 물성을 통해 빛을 조율하고 주변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카르다다Cardada 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석양을 반사하는 티타늄 난간과 한 스위스 디자이너의 개인 정원에 놓인 잎갈나무 목재 벤치의 간소함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경솔함이나 과도함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깨어있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뷔르기는 “처음 스케치를 시작할 때 프로젝트의 방향이나 클라이언트의 요구, 형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대상지가 내 소유의 땅인 것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을 두고 드로잉을 묵혀가며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나간다고 밝히고 있다.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그의 공간에서 각각의 요소는 하나같이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마치 자연의 그것처럼, 뷔르기의 대지는 극도로 경제적이며 불필요한 것이 없다.

그는 ‘지평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결국 동양 조경의 ‘차경借景’을 말한다. 독립된 각각의 장소보다 그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중성적인 경관을 해석하는 틀로서의 ‘조경’과 무언의 경관을 대화하는 공간으로 전이하는 ‘과정’이 바로 뷔르기 디자인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요체는 경관의 변화, 즉 흐름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다. 투시도라는 수단에 익숙해진 우리는 기본적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한 정적인 사고에 머물기 쉽다. 뷔르기가 강조하는 ‘움직임movement’의 디자인은 그러한 매몰된 시각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결과다. 그의 공간에는 항상 시퀀스가 있다. 연결과 단절, 그리고 통과되는 공간. 벽, 혹은 이어짐. 짧은 멈춤과 이동. 그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서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공간을 재발견한다.

한편, 외부에 노출된 조경 공간이 건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시간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점일 것이다. 조경가가 다루는 대상이란 대개 세월에 의해 빠르게 침식되고 어느샌가 그것을 담고 있는 거대한 경관에 흡수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조경가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낡음’과 ‘쇠락’에 대해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조경에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제대로 나이 들어갈 수 있느냐,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달려있을 것이다. 억지로 현재를 유지하려는 몸부림이야말로 가짜의 선명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바래버릴 반짝이는 것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시간의 흐름에 순응해야 진짜가 될 수 있다. 뷔르기의 작품들은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체험해야만 살아 움직이는 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교훈을 웅변하고 있다. 뷔르기는 스스로 움직이는 시간과 쇠락하는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디자인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놓은 하나의 돌이 원하는 모양이 되는 데 오십 년 정도는 걸리기 때문입니다.”


Q. 루이스 바라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A. 멕시코의 건축가 바라간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소수의 작품이 역설하는 바가 무척 깊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극도로 압축된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시적이고 강하다. 나는 수십 년 전, 멕시코시티에서 그와 조우할 기회가 있었다.


Q. 그의 작품 중 당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은?


A. 멕시코시티의 개인 주택이자, 목장인 쿠아드라 산 크리스토발Cuadra San Cristóbal과 엘 페드레갈El Pedregal Gardens을 들 수 있겠다. 그 곳은 이제 사라져 버려 불과 몇 장의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정원은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선 곳이다. 당시 그곳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요즘에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개인 정원에 들어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 그의 집과 사무실, 작업실 등에서 받은 감동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다. 루이스 바라간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길라르디 하우스Gilardi House 또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Q. 나는 당신 작품의 특징을 ‘간소한 풍부함richness in simplicity’으로 요약했다. 바라간과도 닿아 있지만, 스위스의 자연 환경 때문인지 왠지 도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A. 도가적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Q. 『장자』에서는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신발을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신의 작품은 그야말로 미니멀하지만, 동시에 풍부한 감정과 짙은 감수성이 느껴진다. 다시 말해, 작품에서 많은 것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많은 요소가 설계되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수단으로 상당히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대상지에 꼭 맞는 듯한 당신의 작업에서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A. 사실 당신이 파악한 것이 나의 철학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건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나의 호기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몬드리안 등의 예술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예술가는 대개 처음엔 대상에 대해 낭만주의적이지만, 점차 그것들을 압축해간다.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의 머리를 주제로 한 연작을 20년 넘게 꾸준히 발표했다. 극도로 정제되고 간략화된 아티스트로서의 태도가 내가 조경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작은 정원이든, 큰 프로젝트이든 나는 항상 그러한 경계를 탐색하고 그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찾아 헤맨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