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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 청계천 복원사업에는 문화유산 복원사업이 없었다
  • 환경과조경 2005년 10월

청계천 복원사업의 사업명을 보면 개천을 복원하여 고도(古都)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敬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영도교(永渡橋)의 다리유적이나 개천의 호안석축을 모두 파괴하고 홍수에 대비한 통수로 설치 사업 같은 것이었다.
청계천은 태종 11년(1411) 구거(溝渠)를 개착하기 위해 개거도감(開渠都監)이란 관청을 만들어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역부 52,800명을 동원하여 한 달 동안 개울 정비 사업을 하였다. 그 뒤 영조36년(1760)에는 준천소를 설치하고 한성부와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의 인력을 동원, 관원 157명, 역군 215,380명(준천소좌목)이 57일간 개천 정비 사업을 하였다. 영조 49년(1773)에는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보수하였는데 금위영, 어영청, 훈련원의 군사들이 2개월간 작업하였다.
영조는 친히 왕세손(후에 정조)을 데리고 광통교에 나와서 석축완성을 살피고 이 일을 주관한 당상관과 금위영, 어영청의 대장에게 가자(加資)하고 나머지 책임자에게 말을 하사 하였다. 영조가 친히 준천현장에 나온 사실을 그림으로 그린 준천친림관역도(濬川親臨觀役圖)도 있다.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은 준천가(濬川歌)를 짓기도 했다. 준천가 구절 속에 “땅에 있는 맑은 위수(渭水) 장안을 관통하여 쉬지 않고 흐르네, 열두 무지개다리 맑은 하늘에 솟아있고 삼영(三營)에서 쌓은 석축 흐트러짐이 없네, 맑은 물결 찰랑거리고 수양버들 그늘지네.” 이 준천가는 영조시대 청계천의 경관을 말해준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준천사실', '한경지략',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에는 모두 개천(開天)으로 표기되어 있다. 청계천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16년(매일신문)부터 보인다. 청계천은 이와 같이 서울의 상징적 도시 유적인데 복원사업은 하천법의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수표석이 보물 제838호이고 수표교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므로 수표석의 기단과 수표교의 기초석이 청계천 속에 그대로 남아있어 문화재보호법의 규제를 받아야 했다. 청계천 복원설계는 발굴조사를 선행하여 그 결과에 따라 복원설계를 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청계천은 조선왕도의 도시하천이면서 유물이 많이 매장 되어있을 습지이므로 조선시대 동전이나 자기편, 목기편 등 생활용기가 묻혀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도시계획의 토목기술사를 조사 연구하여야 할 중요한 유적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모두 포기하고 통수로 공사를 먼저 발주하여 진행시켰다.
청계천복원공사의 과정을 보자.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 철거시작, 2003년 9월 30일부터 12월 10일 까지 유적의 시굴조사, 2003년 12월 11일부터 2004년 7월 1일 까지 180일간 발굴조사, 발굴조사는 광통교지, 수표교지, 하랑교지, 효경교지, 오간수문지, 호안석축을 대상으로 하였다. 발굴조사는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담당하여 퇴적층조사와 지정말목의 수종조사까지 성실히 수행하였다. 광통교는 해체공사에 입회하여 조사한 것이었다. 발굴결과 통수로 설계는 발굴된 유적을 완전히 무시한 설계이므로 유적을 보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시민단체는 2004년 3월 5일 유적보존을 위해 시장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3월 6일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지역 10m 이내는 통수로 공사를 중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4월 9일 문화재청은 광통교와 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를 중요문화재로 가지정하였다.
1월 12일 문화재 사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 및 교지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의 문화재 현상변경에 대하여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여 심의를 받아 시행하게 하였다. 2004년 4월 16일 문화재사적분과위원회는 수표교와 오간수문은 원위치에 복원하고 광통교는 상류로 이전하여 복원하게 의결하였다. 2005년 1월 21일 시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와 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을 사적으로 지정키로 의결 하였다. 호안석축 1단을 저수로 바닥 원위치에 복원하게 하였다. 저수로 변의 조잡한 파석의 산석 쌓기는 전통양식이 아니므로 발굴된 호안 유적의 양식대로 안전감과 접근성이 좋은 평축 축대로 쌓도록 요청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4년 3월 18일 서울 시장님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필자가 왜식조경을 고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필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조선왕도의 역사적 다리들과 하천의 경관을 옛 대로 보존하면서 홍수대비 설계를 왜 할 수 없을까? 저수로는 회돌이 치는 소(沼)와 담(潭)도 있고 달빛 부서지는 월하탄도 있는 생태하천으로 여름밤에 반딧불이가 펄펄 날아다니는 개울이 보고 싶다.
파리나 런던, 경도(京都)에 가면 역사가 축적된 도시유적이 존경스럽다. 서울은 역사 없애기 경쟁을 하는 천박한 일회용 도시 같다. 고궁(古宮)이 없었으면 삭막할 뻔 했다.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이다. 전통문화의 역사적 파괴가 새로운 발전인양 정당화 하는 의식이 문제이다. 문화는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나를 부정한 곳에 민족문화의 창조는 없다. 일제가 조선 문화는 후진적인 것이기에 버리라고 교육한 기능주의가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수표교와 오간수문이 제자리에 복원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정 재 훈 Jeong, Jae Hoon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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