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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원을 읽다] 정원의 귀환, 그 10년 뒤
  • 환경과조경 2025년 4월호

정원을 말하다

10여 년 전 『환경과조경』 특집의 제목 ‘다시, 정원을 말하다’는 2012년 출간된 『정원을 말하다-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로버트 포그 해리슨, 조경진‧황주영‧김정은 공역, 나무도시, 2012)를 차용한 것이다. 번역서의 제목을 정하며 이런 저런 논의를 했고, 원제 ‘Gardens: An Essay on the Human Condition’을 조금 바꾸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동사로 ‘말하다’가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이 모였다. 평은 좋았지만 판매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고, 판권 계약이 종료됐다. 우리만 좋다고 생각한 책이었을까 하는 초조함이 있었지만―이 기회를 빌려 당시 나무도시 대표였던 남기준 편집장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 조금 일찍 나온 책이었다는 걸 얼마 뒤 확인할 수 있었다. 절판 이후 도리어 책을 찾는 이들이 나타났고 온라인 서점의 중고 책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번 특집호 원고 청탁을 받고 옛 글을 다시 꺼내 보았다(“정원의 귀환에 대한 단상들”, 『환경과조경』 2014년 4월호). 당시에도 10여 년 전의 일을 회고하며 글을 시작했는데, 대학원에서 정원의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필자를 지도한 미술사학과와 조경학과 교수들이 앞으로의 내 생계를 염려해주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글을 쓰던 2014년에는 그 걱정이 기우였나 싶게 정원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정원박람회와 정원 가꾸기 열풍이 불었고, 정원 잡지와 출판물이 증가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정원 조성 붐이 일었고,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던 순천만정원이 국가정원으로 지정되려던 참이었다. 그해가 끝나기 전 한국조경학회 정원학연구센터는 두 번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또 10년이 지났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정원과 관련된 현상들은 스무 번도 넘게 변한 것 같다. 국가정원과 지방정원, 민간정원이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제도와 진흥계획, 관련 법규가 생겼다. 여러 지자체도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있다. 그리고 서른 곳 넘는 지자체가 ‘정원도시’를 선언했다. 개인적으로도 정원과 관련된 연구 용역과 대중 강연, 글쓰기와 번역을 꽤 했다. 이러한 상황만 보면 우리는 이미 정원 속에 살고 있다. 정말 그런가. 2025년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에 등장한 ‘정원’은 내가 배우고 익히고 이제는 가르치기까지 하는 정원과 동의어일까? 정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까? 아니면 정원이란 이름으로 무언가를 기만하고 있는가? 이미 여러 번 제기된 질문이지만 정답은 없고, 그럴듯한 답안을 만들었다 싶으면 다른 질문이 생겨난다. 복잡하게 얽힌 현상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무엇이 강조되는지, 이를 조경사 연구자로서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정원과 가든과 공원과 파크

그간 해온 ‘정원’과 관련된 일들을 되짚어 보면 자아 분열이 일어날 것 같다. 분명 모두 정원을 다루는데 정원사와 미학 관련 수업 시간에 논하는 ‘정원’과 연구 용역에서 다루는 ‘정원’과 해외 저자의 책을 우리말로 옮길 때의 ‘정원’은 모두 같으면서도 달랐다. 정원이 아우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고 어물쩍 넘어가지만, 이렇게 개념이 뭉뚝해도 되는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더 많다. 도대체 ‘정원’은 무엇일까. 조경학에서 정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각주 1) 울타리 등으로 주변을 둘러싸 경계를 두른 물리적 형태가 첫 번째 특징이고, 그 울타리 안쪽에 있는 귀한 것을 실용적인 것(식량, 약초 등) 혹은 즐거움을 위한 것(여가, 과시, 앎의 즐거움, 명상과 종교 등)으로 나눠 두 번째와 세 번째 특징으로 삼았다. 가든(garden)이라는 단어 자체가 울타리(gher-)와 즐거움(-oden/eden)이 결합된 말이고, 울타리 안에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바뀌어 왔지만 언제나 낙원, 당대의 이상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곳이 정원이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는 ‘정원’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장소를 담고 있다. 한자 정庭은 건물과 문 사이, 혹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뜰을 말하고, 원(園)은 동산, 과실수를 심은 곳을 칭한다. 이런 옥외 공간과 서구에서 들여온 가든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 같지 않다.(각주 2) 이 수많은 정원을 섬세하게 분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어처럼 관사, 대소문자로 구분할 수 있다면 미학적 논의가 조금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각주 3) 조경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가 동의어인지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있었는데, 사실 그에 앞서 정원의 정의부터 좀 더 세심하게 봤어야 했나. 그나저나 공공성을 앞세워 랜드스케이프 가든(landscape garden)(ing)을 떠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에서 출발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으로 나아가던 조경은 왜 다시 정원으로 돌아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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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된 순천만국가정원 2023년 4월 1일,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 지 10년 만에 다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했다. Ⓒ유청오

 

‘공원’이라는 말은 어떠한가. 근대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서양 문학 번역서를 읽다가 ‘공원’이라는 말을 보면 불편하다. 귀족 연인들의 밀회의 장소 혹은 요란한 사냥의 장소로 우리가 아는 공원은 부적절할 테니 말이다. 이는 파크(park)를 번역한 말인데, 도시공원이 생기기 전 이곳은 개인이 소유한 방대한 숲, 수렵지를 가리켰다. 산업화에 이어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19세기 후반, 영국 왕실이 소유한 런던 일대의 파크를 대중에게 개방하면서 현대의 공원 문화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유지 파크, 때로는 가든이 공공 녹지가 되었고 파크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확장됐다. 서구의 퍼블릭 파크(public park) 혹은 퍼블릭 가든(public garden)이 서구화를 꾀하던 일본에서 공(공 정)원(公園)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원이라는 말은 큰 고민 없이, 원래의 문화적 함의가 온전히 담기지 못한 채 한국에 이식되어 “국가나 지방 공공 단체가 공중의 보건‧휴양‧놀이 따위를 위하여 마련한 정원, 유원지, 동산 등의 사회 시설”(각주 4)이 되었다.


우리는 서구에서 수입한 개념과 전통적 관념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원과 가든, 공원과 파크를, 심지어는 관련 법률도 다른 정원과 도시공원을 큰 고민 없이 섞어 쓰고 있다. 서울에는 2014년의 글에서 언급했던 “주민을 참여시켜 동네의 방치된 자투리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한평공원’ 대신 ‘매력‧동행가든’이 등장했고, 열린송현 녹지광장은 ‘정원형 공원’(각주 5)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순천만국가정원의 면적은 한평공원 1억 개를 합한 것보다 넓다. 이제 공공 녹지에서 공원과 정원의 구분은 의미 없는 것일까? 아니,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지만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개념 설정 아니었던가. 이 명칭들과 혼란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이고, 지금은 그저 잘 기록해둘 뿐이다. 저 정원과 가든은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가?


제3의 자연

10여 년 전 정원 열풍의 화두로 도시농업적 정원 가꾸기의 유행을 꼽았다. 좀 더 많은 사람이 몸소 정원을 가꾸고, 작게나마 생산의 기쁨을 즐기며 정원에 친숙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던 시기였다. 이후 코로나19 범유행기를 겪으며 정원 가꾸기는 전 세계적 유행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정원 문화가 좀 더 일상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사이 우리의 관심은 상추 재배를 지나 정원(을 가꾸는 일)이 주는 기쁨을 알고 정원을 가꾸는 기술뿐 아니라 정원이 담고 있는 의미의 탐색으로 나아간 것 같다.


이러한 변화는 2025년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작가정원의 주제로 ‘세번째 자연’이 제안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는 예술로서의 정원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들의 서간에서 등장한 표현으로, 조경사학자 헌트(John Dixon Hunt) 등의 연구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알려졌다. 원생 자연 혹은 신들의 영역으로 유추되는 제1의 자연과 인간이 고안하고 가꾼 문화 경관인 제2의 자연을 넘어 자연과 예술이 결합된 제3의 자연, 즉 정원이 생겨났다는 것이 요지다. 이 세 자연은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하나가 우월한 것도 아니며 단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의 하나다. 헌트는 세 자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는 우리가 환경과 맺은 관계를 반영하며, 이 관계와 복잡성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정원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환기하고 가치를 재인식한다고 본다. (각주 6)

 

우리 시대의 정원을 고민하는 것을 목표로 ‘열린 정원’을 주제로 삼은 2013년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이후 공모전에서 정원의 근원적 의미를 다루는 것은 오래간만이기에 무척 반가웠다. 더구나 “주체로서의 인간이 서 있는 문화라는 토대”와 “인간의 타자로서 주체를 성립하게 하는 자연의 경계”에 있어 온 정원이라는 인식 하에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정원의 속성을 표현한 주제”는 정원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듯하다. 하지만 “과도한 조형적 시설물 설치를 지양”한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식재’ 위주의 자연주의 정원”을 권고하는 보도 자료를 보며, 올해 서울시의 ‘추구미’를 지레짐작하게 된다.(각주 7)

 

아크, 환경을 회복시키는 다정한 행동

대규모 도시공원과 정원만이 할 수 있는 역할과 가치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100개, 1,000개의 소정원 조성을 통해 더 많은 이가 일상에서 정원을 누릴 때의 효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이는 비인간 생명체에게도 마찬가지다. 생태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는 이런 작은 공간들을 아일랜드의 정원 디자이너 메리 레이놀즈(Mary Reynolds)는 ‘아크(Ark)’ 조성을 통해 가꾸고 있다. 영화 ‘플라워쇼(Dare to be Wild)’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레이놀즈는 첼시 플라워쇼 역대 최연소 금메달 수상이라는 영광을 뒤로 하고, 큐 왕립식물원(Kew Royal Botanic Garden)을 포함한 대도시 공간을 야생 정원으로 조성했고, 나아가 땅을 돌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레이놀즈가 설립한 아크(각주 8)는 창틀, 주택 단지의 경계, 고립된 작은 땅 조각 같은 우리 주변의 작은 자연을 지키고 재야생화한다. 이를 통해 작은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과적으로 생태계가 되살아난다. 조각(patch)-통로(corridor)-바탕(matrix)이라는 경관생태학의 기본 원리가 그의 정원에서는 ‘환경을 회복시키는 다정한 행동(Acts of Restorative Kindness)’, 이 시대의 방주(Ark)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돌봄에 정원의 본질이 있다. 정원은 그저 보기 좋게 치장한, ‘인스타그래머블’한 녹지 공간이 아니고, 사시사철 꽃이 만발한 곳은 더더욱 아니다. 정원은 모두를 환대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우리가 감각을 회복하고 균형을 잡게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 『정원을 말하다』에서 해리슨은 인간의 조건이 돌봄이고, 정원이 이를 가꾸는 장임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돌봄과 걱정이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는 케어(care)의 어원이 된 쿠라 여신의 신화를 인용했는데, 그가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기에 우리에게는 돌보고 염려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원을 가꿀 때 가장 잘 발현된다. 끊임없이 돌보고 염려하고, 시간의 흐름과 자신의 작은 존재를 깨닫고, 지구 전체로 돌봄과 염려의 관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모두가 실제로 정원을 가꾸지 않더라도, 정원으로 은유되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가꾸어야 하는 시대에 이러한 정원사의 정신은 더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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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공원의 회랑과 중정 Ⓒ유청오

 

다시 정원을 말하려면

삼청동 일대 미술관들을 부지런히 다니던 시절, 별다른 안내문 없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기무사와 인근 부지를 지날 때면 괜히 긴장되곤 했다. 토박이 주민에게 용산공원 부지 못지않게 복잡한 이곳의 역사를 듣기도 했지만, 여전히 담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 기업의 한옥호텔이 지어질 뻔한 곳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공원으로 조성된다는 소식이 2020년에 들려왔다. 그때 본 이미지는 질 클레망(Gilles Clement)의 책에서 봤던 ‘제3의 경관(Le Tiers paysage)’을 떠올리게 했다. 오랜 기간 방치되어 황무지처럼 보이지만 생물 다양성 측면에서는 더욱 풍요로운 곳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다니. 핏 아우돌프(Piet Oudolf)가 기존 식생을 면밀히 파악해 식재한 하이라인만큼이나 멋진 생태적 공원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했지만, 몇 년 후 공개된 열린송현 녹지광장에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야생화 군락지’가 펼쳐졌다. 원래 있던 식생, 수십 년 동안 방치된 땅에서 나타난 천이는 어디로 간 걸까. 이전의 공원보다 시설이 줄어 탁 트인 녹지를 도심 한복판에서 볼 수 있다지만 이 열린송현 녹지광장은 터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끝내주는 ‘움직이는 정원(jardins en mouvement)’, 진정한 자연주의 정원이 될 기회를 영영 잃었다. 그리고 그 이름만큼이나 정체성이 모호한, 야생의 시뮬라크르만 남았다.


그리고 리노베이션을 마친 오목공원을 떠올렸다. 한때는 신도시였던 곳에 조성된 공원에 쌓인 시간의 켜를 존중해 “없애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남기는”(각주 9)설계는 정교하면서도 다정하다. 수도원의 클로이스터 같기도 한 회랑과 중정은 아늑하고,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만으로도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대에 따라, 행사에 따라, 공원 내 위치에 따라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고 어색하지 않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필자가 사는 동네에서 멀다는 것뿐. 오늘날 서울시를 포함한 여러 지자체에서 선포한 ‘정원도시’의 이상은 필자에게는 너무 거창하고 막연하다. 정원과 도시 중 어느 쪽에 방점이 있는 걸까. 하지만 오목공원에서, 공원이라고 부르지만 오늘날 도시에서 모두가 누리는, 그리고 누려야 하는 정원의 모습을 보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정원을, 도시 정원을, 정원도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정리

1. 황기원, “정원의 원형 시론”, 『환경논총』 20, 1987, pp.85~97.

2. 그래서인지 『조경개념사전』에서도 이를 “정원(전통적 의미)”, “정원(현대적 의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김순기 외, 『조경개념사전』, 집, 2023.

3. 18세기 영국에서는 단순히 정원 일을 하는 이를 가드너(gardener),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정원을 설계하는 이를 가드니스트(gardenist)로 구분하기도 했다. 최근 살펴본 일본의 미학자이자 정원사 야마우치 도모키(山內朋樹)의 논고에서도 숙고를 바탕으로 정원을 설계하고 조성하는 니와시(庭師)와 원예적으로 정원을 가꾸는 가드너를 분리해 칭했고(『庭のかたちが生まれるとき』, フイルムア-ト社, 2023), 미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페너의 연구에서도 일반적인 정원과 구분되는 미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는 정원을 더 가든(The Garden)으로 표기했다(David Fenner·Ethan Fenner, The Art and Philosophy of the Garden ,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4.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

5. 김기훈, “송현동 부지 ‘정원형 공원’ 본격 조성…도심 문화관광공간으로”, 「연합뉴스」 2024년 9월 27

일.

6. 황주영, “정원, 제3의 자연”, 『환경과조경』 2018년 8월호, pp.118~119.

7. 차윤정, “보라매공원에 펼쳐질 ‘세 번째 자연’…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작가정원 국제공모”, 서울

특별시 보도자료, 2024년 11월 15일.

8. 아크 홈페이지(wearetheark.org)

9. 김선미, “도시의 라운지로 변신한 오목공원 회랑의 마법”, 「동아일보」 2024년 2월 11일.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미술과 조경의 역사를 공부했고,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을 좋아하고,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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