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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길
  • 원종호
  • 환경과조경 2025년 1월호

나와 나의 설계를 설명하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의 보이지 않는 조경’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디자이너는 각자의 생각과 일상을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홍보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시대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조용히 작업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고 작업물을 홍보할 재주도, 적극성도 부족하다. 나와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이하 JWL)의 작업은 내 성격과 묘하게 비슷하다. 조형적 혹은 개념적으로 설계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프로젝트도 없다. 다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작업물이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조경은 심심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다른 조경가의 작업에 비해 명확하게 드러나는 조형이나 개념이 없다고도 한다. 내 작업을 규정하는 포인트를 나 역시도 짚어내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설계의 비가시성은 내가 가고 있는, 가고자 하는 조경설계의 방향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조경, 하지 않은 듯한 조경, 원래 있던 듯한 조경’ 등의 어휘로 말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조경은 매우 높은 수준의 설계적 완결성 없이는 획득하기 어렵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조경은 높은 설계적 완성도의 역설적 표현이다.

 

남들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눈에 띄는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동시대 건설 산업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수년간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좀 더 가시적인 방식의 조경을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많은 설득과 성공, 때로는 좌절을 겪었다. 우리 생각에 동의했던 사람보다는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덤덤하게, 그리고 꾸준히 내가 지향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해 나가고 싶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조경을 구현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로 성장해 나가고 싶다.

 

편안한 풍경 만드는 법을 배우다

학부 시절부터 막연하지만 설계가가 되고 싶었다. 다만 조경설계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석사 시절부터다. 졸업 후 대학원 석사 과정의 지도 교수에게 합리성에 입각한 조경계획의 기본을 배웠고, 휴학 중 일했던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서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던 그 시기에 설계관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첫 직장은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였다. 당시 김용택 소장의 곁에서 직간접적으로 듣고 경험했던 것들이 조경가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사무실에서 대안을 고민하거나 현장에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그는 입버릇처럼 늘 편안한 풍경, 억지스럽지 않은 풍경을 강조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일을 배우다 보니 어느새 그가 만든 풍경이 제일 편안하게 느껴졌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당시 나는 호암미술관의 희원을 참 좋아했다. 뭐 하나 거스르지 않는 편안한 풍경, 절제미가 느껴지는 조형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희원 조성 당시 설계 PM이었던 김 소장을 통해 희원의 공사 도면집을 볼 기회가 생겼다. 편안한 희원의 분위기처럼 도면 집도 소박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편안한 풍경 이면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양의 도면, 아름다운 디테일, 높은 수준의 기술적 고민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편안하고 비가시적인, 즉 보이지 않는 조경은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설계적 완결성 없이는 획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설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프로젝트를 뽑자면 바로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를 꼽을 수 있다. 2013년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기술사무소)가 진행하던 경의선숲길 연남동 구간 설계 용역에 정욱주 교수와 함께 기본계획 실무진으로 참여했다. 조경계획 진행 과정에서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협의 과정을 어깨 너머로 목격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대상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 범인이라면 그냥 지나칠 잠재력 있는 경관을 발굴해 이를 설계에 반영하는 방법,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편안한 공원 풍경을 만드는 설계적 해법 등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나의 머릿속을 살뜰히 채워주는 살아있는 지식 그 자체였다.

 

당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의선숲길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너무 심심하지는 않을까, 너무 이상적인 생각 아닐까. 자문하며 혼자 걱정도 많이 했다. 준공 된 모습을 본 뒤에는 두 분이 그때 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깨닫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서울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이 된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 나의 설계관을 구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직관적 설계로 만드는 공간 문화

설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설계의 명징성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설계의 개념, 배치, 구조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계가 중요하다. 말하는 개념이나 제안하는 이미지가 깊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하고 꼬인 설명은 아닌지, 장식적인 면에 치우쳐 원래 하려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지 늘 경계한다. 요컨대 치장과 덧댐을 줄이고 본질과 직관에 가까운 설계를 지향한다.

또한 조경설계를 통해 구현된 공간이 공공성을 증진하고, 특별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켜 우리 사회에 문화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간을 직간접적으로 이용할 잠재적 사용자에 대한 파악에 많은 시간을 쓰며, 조형적으로 최대한의 완결성을 갖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팀원들과 늘 고민한다. 공간의 수준은 동시대의 문화적 수준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믿기에 우리 조경가도 문화인이라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다.

 

묵묵히 나아갈 길

부족한 경력과 실력이지만,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걸어갈 길이 조경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으로 미치길 기대하며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좋은 설계를 통해 양질의 공간을 꾸준히 세상에 내놓고 싶다. 단편적인 프로젝트로 기억되는 대신 꾸준히 좋은 작업을 생산하여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내공 있는 조경가로 기억되고 싶다. 또한 조경설계에 대한 여러 편견을 깨고 싶다. 조경가는 재능 있는 사람만 해야 한다, 설계를 하면 야근과 철야는 필수다 등 근거 없는 이야기가 꽤나 많다. 이게 사실이 아니란 걸 나와 JWL을 통해 증명하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이러한 편견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또래에 비해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았지만 디자인이 즐거웠고 열심히 노력해 설계를 업으로 삼았다. 스스로 야근을 힘들어 해서 업무 시간의 집중도를 최대화하고 야근을 지양하는 사내 문화를 만들어 왔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조경가들, 이제 막 조경설계에 뛰어든 주니어 조경가들, 설계가 내 길이 맞는지 오늘도 수백 번 고민하고 있을 조경학도 모두를 응원한다. 우리 모두 한국의 젊은 조경가다.

 

원종호는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와 현대건설에서 설계와 시공 실무를 경험한 뒤 2017년부터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에서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크고 화려하며 눈에 띄는 조경보다는 보이지 않는 조경, 하지 않은 듯한 조경, 원래 있던 듯한 조경을 통해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내공 있는 조경가로 기억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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