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공원을 그렇게 멋대로 밟고 다닌 건 처음이었다. 살기 위한 걸음이었다. 잔디를 가로지르고, 철책을 무시하고, 녹지와 길의 경계를 가르는 울타리 위에 올라서고, 잎이 다 떨어진 화살나무의 앙상한 가지에 패딩이 뜯기지 않도록 우스꽝스럽게 걸었다. 인파에 가려 발밑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앞 사람이 “요 앞에 턱 있어요. 조심하세요!” 하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난해 초 끊어졌던 인대를 떠올리며 더욱 조심조심 걷는 수밖에. 국회의사당 초록 지붕을 표적 삼아 걸으며 ‘광장’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절실해졌는지 모른다.
친구 K는 모이기에는 역시 광화문광장만 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발에 걸리는 턱이 없는 공간, 차량이 덮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원한다면 행진을 할 수 있는 공간, 고개만 돌리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 광장이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그래도 여의도공원은 평지 공원이라 다행이었다. 어느 SNS에서 봤는데, 부산에는 주로 서면에 모인단다. 파도타기를 하면 조금 이어지던 물결이 금세 갈래갈래 나뉜 골목으로 흩어져버리고, 오르막길이 많아 행진을 하다보면 숨이 차서 구호와 노래 소리가 점점 잦아든다고 그랬다. 그래서 광장이 없는 도시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인터넷이 먹통이 됐던 기억을 떠올리며 LED 화면과 통신사 이동기지국 차량이 가까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 앉아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고 연단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은 집중할 수 없었다. 핫팩을 주무르고 보온병의 물을 마시려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질까 봐 관두었다. 예고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마음을 빼앗은 건 한 야구 팀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오른 시민의 발언이었다.
그는 자신을 “앞선 세대가 쟁취한 민주주의의 드넓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태어난 세대, 여러분이 일구어낸 생존이라는 결실”이며 “그래서 삶을 꿈꾸게 된 세대”이고 “절박함이 아닌 사랑으로 연대하는 세대”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곳에 서게 된 이유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빗대어 말했다. “무너진 민주주의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무승부가 있을 수 있습니까? 콜드게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천 취소, 강설 취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스포츠 팬 여러분! 우리는 국가대표처럼 끝까지 맞설 것입니다. 게이머 여러분! 우리는 정의의 엔딩을 위해 몇 번이든 리트(리트라이)할 것입니다! 오타쿠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최애인 것처럼 민주주의를 수호할 것입니다. 빠순이 여러분! 우리는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보려고 밤새워 기다렸듯, 찬란한 민주주의의 태양이 다시 뜨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함께, 여기에서, 독재의 담장을 넘어 홈런을 칠 것입니다! 맞습니까? 야구 팬 여러분, 스 트라이크를 세 번 놓친 타자에게 네 번째 기회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광장에서 꽉 찬 직구를 던질 것입니다.”
세상은 넓고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그리 넓지 못하다. 세상은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관심이 없지만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것,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기 다른 세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세상의 넓이는 나의 인식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내가 구축하는 세상의 크기는 점점 커지게 된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해본 사람들의 세계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발 딛고 선 세계가 끔찍해지더라도 그곳을 떠나기보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지난해 12월 7일,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물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 물음을 들었을 때, 광장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의 이야기를. 세계가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워지는 만큼, 그 세계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늘어나리라 믿는다. 나는 전보다 더 광장을 사랑하게 됐다. 그 너른 광장의 크기만큼 나의 세계도 넓어졌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