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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길 수 있다는 건
  • 환경과조경 2024년 11월

훈화 말씀 같은 건 적지 말자고. 땡볕이 여과 없이 꽂히던 운동장, 끝도 없이 이어지던 교장 선생님의 느릿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늘 다짐하곤 한다. 유치한 자기반성을 담은 글, 같잖은 가르침을 전하는 듯한 글은 일기장에나 적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자신이 없었다. 너무 엄청난 소식에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와서일 테다.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한국 최초 수상자인 것은 물론이고, 아시아 여성으로서도 처음, 유색인종 여성으로서는 두번째 수상이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눈만 껌뻑였고, 친구들과 메신저로 떠들면서 서서히 현실의 감각을 되찾았다. 보탠 것도 없으면서 내가 상을 받은 것 마냥 기뻤다. 본 적 없는 서점 오픈런 사태와 밤새 기계를 돌렸다면서도 미소를 숨기지 못 하는 인쇄소 사장의 인터뷰를 보면서는 독서 붐이 잡지에까지 영향을 미쳐 구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망상을 했다. 멈추고 싶었지만 한강이 최근 루소의 『식물학 강의』를 읽고 있다는 인터뷰가 허무맹랑한 상상을 부채질했다.(각주 1)

 

대구와 광주. 이달에는 유독 취재 장소가 서울에서 멀어 버스와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정이 남아 있을 때면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평을 꺼내 읽었다. “한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했다. 그녀는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고리에 관한 독특한 인식을 시적이고 실험적인 현대 산문으로 표현한 혁신가다.” 한강이 다루는 소재 때문일까,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참 사람이 징그럽고 싫어진다. 연약함을 핑계로 사람은 어디까지 폭력적이고 악랄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도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 쓰기에 늘 동력이 되었던 게 인간이기 때문인지, 싫어도 계속해서 골몰하게 된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저는 언제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민을 매번 다른 방식의 소설들로 다루고 싶어했고요. …… 생각하고 서성이고 고민하고 질문하고 길을 잃고 우회하고 되돌아오고……. 그런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고 지금도 느낍니다. 그렇게 질문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요.”(각주 2)

 

맥락 없이 느껴지더라도 그냥 좋아하는 한강의 소설을 소개하고 싶었다. 마침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과 잘 어울리는 『희랍어 시간』. 언어를 잃은 여자와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고요 속에서 흘러간다. 이소연 문학평론가는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라고 이를 바꾸어 말하기도 했다. 이때 언어는 세상과 만나는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한 사람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무언가다. 언어를 점차 잃을 때마다 조금씩 여자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소리, 절대 들릴 리 없는 그 소리가 내게는 침묵이 만든 공백 속에서 천둥처럼 울려댔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각주 3)는 문장을 만나고 난 뒤로는 눈이 쌓인 풍경을 마주하면 눈의 차가움보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리의 감각을 먼저 느낀다.

 

너나 할 것 없이 말하고 소리내기 바쁜 시대에 닫힌 입술이 갖는 힘을 생각한다.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길 수 있다는 건.”(각주 4) 여자의 말은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각주 5)라는 막스 피카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연필을 쥔 손을 찬찬히 움직여 스케치북 위에 그려내는 행위 같았다. 동시에 온전히 나의 결심으로만 닫아버릴 수 있는 눈꺼풀과 입술이 내게 있음을, 그것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각주 6) 언젠가 그 적막의 시간을, 지금은 사람이 몰려 잠시 문을 닫은 한강이 운영하는 ‘책방오늘’에서 보내고 싶다.



**각주 정리

1. 김유태, “고단한 날,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매일경제」 2024년 10월 11일.

2. 위의 글

3. 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p.174.

4. 위의 글, p.161.

5. 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역, 『침묵의 세계』, 까치, 2010.

6. 한강, 『흰』, 문학동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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