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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아무튼 너무 심심하니까 세상이 다 자세히 보이는 거야
  • 환경과조경 2024년 10월

대부분의 물건과 공간이 막 만들어졌을 때 가장 윤이 나는 반면, 조경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식물 때문이다. 채 자라지 못한 그라스가 맨땅을 다 가릴 정도로 풍성해질 때까지, 앙상해서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무들이 잎을 틔우고 줄기를 단단하게 키울 때까지. 그래서인지 갓 태어난 조경 공간, 특히 식물이 두드러지는 곳에서는 허전함을 느끼기도 한다. 식물이 주인공인 정원에서는 그 영향이 더 커진다.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이하 정원박람회)의 본행사가 끝나고 상설전시가 진행 중이다. 뚝섬한강공원에 갈 때면 그 사이 확연히 달라진 정원의 모습에 놀라곤 한다. 궁금했다. 과연 심사위원들은 정원이 이렇게 변할 거라는 걸 알았을까. 정원의 만듦새를 평가해야 한다면 그 시기는 언제가 되어야 적절할까.

 

정원박람회 작가정원 설계안들이 발표되었을때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아슈라 풀 아자드(Md Ashraful Azad)의 ‘심심해지다 | 명상하다 | 고마워하다(Be Bored|Meditate|Appreciate)’(2024년 6월호 78~81쪽)가 그것. 맥락을 알 수 없는 형용사와 동사의 나열이 궁금해 들여다봤는데 내용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항상 디지털 기기에 사로잡힌 채 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심심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심심함은 정신 건강에 필수적입니다. …… 정원을 통해 이러한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앉으면 스크린이 시야를 가리며 나뭇잎, 하늘 또는 땅만 볼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땅에는 검정개관중만을 식재합니다. 여러 식물로 이루어진 정원에서는 각각의 식물에 집중하기 어려워 모두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식물로 구성된 정원을 만들고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특정 식물의 아름다움을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아자드는 적당히 심심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명상하게 하고 이로써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는 목표를 단순하지만 명쾌한 형태의 정원으로 이루려 했다. 정원 바깥의 것들을 잊게 만드는 띠 형태의 스크린이 타원형의 영역을 형성하고, 내부에는 곡선형 벤치를 놓는다. 동그란 디딤돌이 벤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나머지 땅에는 한 종류의 식물만이 심긴다. 망망대해 위 쪽배에 탄 것처럼 벤치에 앉아, 파도처럼 일렁이는 식물의 바다에 발을 담근 내 모습을 상상했다. 아직까지 그런 정원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조성 과정에서 검정개관중이 수크령 ‘하멜른’으로 바뀌었지만, 주제를 뒤흔들 만한 변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하나의 식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로 검정개관중보다 크게 자라는 하멜른이 더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 것 같아서 오히려 좋았다. 부푼 마음을 끌어안고 정원을 찾았을 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초록으로 넘실거리는 풍경은커녕 뙤약볕에 노출된 땅이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하멜른이 충분히 자라기에는 정원 조성 기간이 턱도 없이 짧다는 걸 잊고 있었다. 허옇게 드러난 맨땅에 괜히 내가 머쓱했다.

 

하지만 9월 중순 방문한 아자드의 정원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벤치가 잠긴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하멜른이 풍성하게 자랐다. 벤치에 앉았을 때의 시야만 가리도록 스크린을 공중에 띄워 설치했기에 그 아래로 넘실거리는 하멜른을 본 사람들은 호기심을 못 이기고 빨려 들어가듯이 정원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벤치에 앉았다. 기분 좋은 따분함에 젖어 그 감각을 즐겼다. 아자드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 같았지만 정말 자꾸만 하멜른을 뜯어보게 됐다. 지루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너무 심심해서 세상이 자세히 보였고, 그러다 보니 시를 쓰게 됐다(각주 1)는 김용택 시인이 아자드와 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간의 정원박람회가 지나온 도시와 공원의 정원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안부가 궁금해졌다.

 

**각주 정리

1. 김용택의 에세이 “심심해서 그랬어”(『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 시』, 예담, 2014)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심심해서 그랬어. 공부를 하다가 일을 하다가 이렇게 마루에 혼자 앉아 있으면 너무 심심한 거야. 봐라, 시골이 참 심심하지. 나무도 강물도 하늘도 구름도 풀잎들도 다 심심해 보이지. …… 아무튼 너무 심심하니까 세상이 다 자세히 보이는 거야. 자세히 보니까 생각이 일어났다. 그 생각들이 내 마음의 곡식 같아서 버리기가 아까운 거야. 그래서 그냥 글로 옮겨 써봤어. 그랬더니 시가 되었어. 어느 날 내가 시를 쓰고 있어서 나도 놀랐다니까. 정말 심심해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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