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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숨 쉬듯 관찰하고, 꾸준히 기록하기
기록 생활
  • 환경과조경 2024년 7월

1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나름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은 나의 행복이며 오래된 습관이다. 어릴 적 살던 집 베란다 테이블 위에는 몇 가지 물풀이 사는 항아리 뚜껑이 있었는데 햇살이 드는 오후면 그 곁에 앉아 반짝이는 물 표면이나 송사리의 움직임, 생이가래 잎의 잔털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지금도 그때의 감각이 생생한데, 여전히 나는 물이 고인 곳이 있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곤 한다.

 

관찰한 것을 기록하는 일은 나의 일상에 큰 즐거움이다. 군인 시절, 훈련과 행사의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던 나는 부대의 작은 초지에서 진행하는 훈련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봄, 가을이면 매주 같은 훈련장을 방문했었다. 그 당시 무엇보다도 눈에 띄었던 것은 작은 풀들의 변화였다. 민들레와 제비꽃으로 가득하다가도 한 주가 지나면 봄맞이꽃이 땅을 덮고, 여름 장맛비에 가끔 웅덩이가 생기다 가을이면 붉게 물든 띠가 들판을 뒤덮는 모습. 시기마다 풍경은 바뀌었지만, 이듬해가 되면 풀들의 돌림 노래가 반복됐다. 그 풍경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었기에 훈련장으로 가는 고된 발걸음에는 늘 약간의 기대가 묻어 있었다. 오늘은 어떤 풍경일지, 작년에 본 흰 솜털 같은 띠꽃을 올해는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어쩌면 나는 일상에서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돌볼 것이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관찰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며 다시 돌아올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나의 일상을 더 풍요롭게 했다. 기록 행위는 나와 관찰 대상이 처한 상황에 따라 느슨해지기도 하고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기도 했지만, 나의 일상에는 관찰하고 기록하는 무언가가 늘 있었다.

 

관찰을 통해 발견한 것은 손에 든 아이스크림 같아서 금방 녹아버렸다.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바로 먹던지, 냉동실에 넣어두던지 해야 한다. 먹는 것이 기록물의 행태로 정리하는 행위라면 냉동실에 넣는 것은 정리를 미뤄두고 일단 기록한 것을 보존하는 행위 같다. 쉽게 말해 숙제를 미루는 것, 관찰할 때마다 미루지 않고 부지런히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일상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다 보니 머릿속 냉장고에는 점점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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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다닐 때 테라스에 있던 작은 테이블에 비와 바람, 낙엽, 눈이 남긴 흔적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왼쪽 상단부터 2021년 1월 18일(첫 번째·두 번째 사진), 20일, 22일, 25일, 26일, 27일, 29일, 2월 4일의 기록. 기록은 2020년 11월 2일부터 2021년 8월 10일까지 진행했다.

 

2 새, 나무, 풀꽃, 벌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들 삶의 꼴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늘 즐겁다. 작은 생명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지구와 태양의 위치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또 사람은 어떻게 이들과 만나왔으며 오늘 이곳에서는 어떻게 자연과 만나고 있는지, 알면 알수록 경이롭고 아름답다. 오랫동안 잘 정리한 기록은 무심코 지나치던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게 도와주기 때문에 관찰한 것을 성실히 기록하고자 한다.

 

새의 경우 이버드(eBird)나 네이처링(Naturing)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관찰한 새의 종류와 개체 수를 사진과 함께 기록하는데, 더 알아낸 정보나 자세한 관찰 내용은 노션(Notion) 애플리케이션에 정리한다. 캘린더 기능을 활용하면 탐조한 날짜에 맞춰 계절별 도래 양상을 내가 찍은 사진과 함께 기록할 수 있어서 좋다.

 

식물 기록의 경우 조금 더 복잡한데,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속이나 과 수준에서 공통된 특성과 서식처별 특징, 분포, 기타 생물 분류군과의 관계, 발견한 관련 문헌이나 도감의 내용을 한 곳에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몇 년 전, 노션의 ‘데이터베이스’ 기능을 활용한 지금의 기록 플랫폼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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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로는 정기적 정원 기록 역시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가 됐다. 최지은과 함께 만든 제2회 서울식물원 식재 설계 공모전의 ‘37.5N 126.8E’가 그 시작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방문했는데, 돌볼 곳이 늘다 보니 요즘은 계절에 한 번 가는 게 고작이다. 요즘은 집에서 가까운 광야숲1과 작년에 조성한 장안동 늘봄어린이공원의 작은 정원을 자주 찾는다. 바쁠 때는 겨우 몇 분, 여유 있을 때는 몇 시간을 어슬렁거리며 오늘은 어떤 변화가 있는지 관찰하고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잘못된 것과 잘된 것 무엇인지 파악하고 예상하지 못한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찍은 사진은 프로젝트별 폴더에 날짜순으로 저장해두며 필요한 경우 노션의 기록 플랫폼에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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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6일 아침 9시 35분경, 서울식물원 정원 37.5N 126.8E의 웅덩이에서 발견한 된장잠자리 유충 사진 가운데 물 속에 반쯤 잠긴 채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된장잠자리 유충이다. 이 발견을 통해 도시의 정원과 웅덩이가 갖는 가능성을 확장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3  정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다. 작업물의 경우 많은 사람이 경험했듯 폴더나 파일명에 ‘최종’, ‘수정’을 우수수 덧붙이며 증식시킨다. 때로 어떤 게 ‘진짜 최종’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더군다나 요즘은 너무 바쁘다 보니 늘어나는 파일들을 제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모니터링이나 탐조하며 찍은 몇 백 장의 사진은 제때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정작 필요한 사진을 찾기 정말 어려워진다. 노션에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려울 때는 당일 찍은 사진을 넣은 폴더명에 날짜와 인상적인 관찰 내용을 적어 다시 찾을 때 도움이 되도록 한다.

 

나만의 특별한 기록 방법은 없지만 좋아하는 방식은 있었다. 학생 때는 무엇이든 노트에 연필로 기록하는 것을 선호했다. 작은 노트 하나를 늘 가지고 다니며 아이디어든, 일기든, 짧은 글이나 낙서든, 뭐든 다 적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뒤로는 디지털 파일을 정리할 곳이 필요했다. 블로그, 구글 문서, 드라이브 등 몇 가지 매체를 경험했고 지금은 노션 애플리케이션에 안착했다.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만 있으면 기록할 수 있고, 텍스트, 이미지, 영상, 음성 녹음, 인터넷 링크 등 다양한 형태로 정리할 수 있다. 서로 연결할 수도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더불어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올린 파일을 원본으로 다운받을 수 있고 기록의 일부는 간편하게 웹 링크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공유하거나 함께 편집할 수 있다.

 

지금은 다양한 사람과 협업하고 개인 작업도 하다 보니 작업물의 경우 폴더를 구분하게 된다. 누구와 함께한 작업인지에 따라 크게 폴더를 구분하고, 그다음은 프로젝트 성격과 상관없이 시작된 날짜와 프로젝트 이름을 적은 폴더에 파일들을 넣어 정리한다.

 

6 인스타그램은 많은 사람과 한번에 소통할 수 있는 창구다. 간편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고 내가 본 예쁜 것들을 자랑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2022년에 포트폴리오 삼아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작업물을 한 곳에 정리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나를 파악하기 좋은 곳이지만 정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요즘은 거의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2년쯤 지났으니 새로 수행한 프로젝트를 올릴 시점일지도.

 

*각주

1. SM엔터테인먼트의 후원으로 마인드풀가드너스 등 여러 주체와 협업해 조성한 서울숲 내 정원이다. 도심 생물 다양성 및 생태 감수성 증진을 목표로 삼은 곳이다. 역시 최지은과 함께 설계하고 여러 사람과 협업해 만들었으며 올해 5월 확장 공사를 마쳤다. 

  

신영재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사무소 HLD에서 4년간 근무했다. 현재는 생태적 정원설계 및 시공 스튜디오 초신성과 디자인·아트 스튜디오 madswanattack(미친백조의공격)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심연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고 그들이 자리할 곳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조경가와 시인은 닮았다고 생각한다. 작고 여린 것들이 쉬이 잊히는 옹색한 시대에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고민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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