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은 1941년생 여성 조경가,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의 계절이다. 지난 4월 5일, 그가 직조해온 수많은 경관의 설계 도면과 모형, 사진과 영상, 기록과 자료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회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4년 9월 22일까지)가 개최됐다. 4월 17일에는 그의 조경 인생과 대표작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가 전국 주요 극장에서 개봉됐다.
“선유도공원, 양재천, 예술의전당 등 내 인생의 중요한 공간들이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운명과도 같았다.” 전작 ‘이타미 준의 바다’(2019)와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2020)를 통해 건축 다큐멘터리스트로 자리매김한 정다운 감독은, “자연의 생명력을 전하고 지키기 위해 줄곧 노력해온 조경가 정영선의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아 영화를 통해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연 역할을 하는 장소는 정영선 조경의 정점인 선유도공원이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으로 계절을 순환하며 선유도공원의 공간감과 시간성을 포착한다. 영화는 선유도공원을 플랫폼 삼아 계절마다 들고나며 정영선의 다른 작업들, 이를테면 호암미술관 희원, 서울 아산병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경춘선숲길,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에 펼쳐진 경관 미학을 재구성한다.
선유도공원은 폐기된 정수장의 구조와 기억을 살린 ‘발견의 디자인’으로 한국 공원 설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선유도공원에서 우리는 한숨에 다가오는 한강의 풍경과 냄새, 살갗에 와 닿는 서걱한 강바람, 울퉁불퉁한 시멘트 기둥의 생살과 지워지지 않는 물 얼룩의 물성, 옛 시간의 흔적과 새로운 녹색 생명체가 동거하며 빚어내는 경이의 미감을 마주한다. 역동하는 선유도공원의 정동을 담아내면서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대지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경관의 맥락을 엮는 정영선 특유의 작업 태도에 주목한다.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또 다른 주연 공간은 정영선의 검박한 들풀 마당이다. 영화는 그에게 위로를 건네는 내밀한 정원이자 야생 풀꽃의 성장을 돌보고 가꾸는 개인 실험실이기도 한 양평 집 마당을 계절별로 관찰한다. 자신의 시그니처 식물 소재인 미나리아재비, 병아리꽃나무, 쑥부쟁이와 대화하는 할머니 조경가의 일상. 이 영화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나는 ‘연결사’라고 보면 돼.” 양평 집 처마 밑 탁자에서 식재 디자인 개념을 파스텔로 스케치하면서 그가 던지는 이 짧은 문장은 자신의 조경론을 요약하는 표현이자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간명한 정의에는 ‘지사(地史)’와의 관계, 시공간적 맥락과의 관계, 주변 경관과의 관계, 도시 조건과의 관계를 연결하는데 남다른 가치를 두는 그의 태도가 압축되어 있다. 연결의 태도는 생각이나 말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형과 식물을 매개로 현실의 경관에 실천된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땅에 쓰는 시’는 관계와 맥락을 읽고 잇는 ‘연결의 조경’의 다른 표현일 테다. 자칫 낭만적으로 해석될 법한 이 표현은 조경가가 젊은 시절 시인을 꿈꾸었다거나 감성적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정영선의 글 몇 구절에서 우리는 그의 조경이 ‘땅에 쓰는 시’인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경관은] 글자의 선택과 배열, 호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시’처럼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환경과조경』 137호, 131쪽).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107쪽).
『환경과조경』은 한국조경가협회와 함께 오는 7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을 통해 한국 조경 50년의 성과를 조회하는 심포지엄,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를 연다. 발제문과 토론은 8월호 지면에 담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