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 보이(Che vuoi), 무엇을 원하는가
몇 해 전 나의 설계 작업을 주제로 한 강연의 제목을 정해야 했다. 나의 설계를 관통하는 개념이 필요했는데, 사실 그때까지 나의 설계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모든 프로젝트의 조건은 모두 달랐으며, 설계는 대개 나의 순수한 의지를 구현한 작품이 아니라 수많은 내부와 외부의 욕망을 수용한 일종의 타협적 결과물이었다. 일종의 선언이 필요했던 나는 모순이라는 개념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는데, 모순은 강연을 준비했을 무렵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새로운 광화문광장과 춘천 시민공원 프로젝트의 핵심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관된 지향점을 갖고 이뤄지지 않았던 나의 설계를 하나의 자아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작업을 소급적으로 재구축해 나아가야 했다. 이는 현재 시점의 불완전한 설계적 주체를 상정하고 모순이라는 기호를 관통하는 과거의 누빔점들을 찾아가며 새로운 주체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주체는 욕망의 목적지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의 설계적 자아가 모순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i(a) 이상적 자아
결여된 주체가 소급적으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대상은 이상적 자아다. 쉬운 말로 하면, 롤 모델이다. 별 볼 일 없던 시절 누구나 되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존재한다. 미숙한 주체는 구체적 대상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상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 내 설계적 주체의 이상적 자아는 아이젠만(Peter Eisenman)과 타푸리(Manfredo Tafuri)였다. 20대에 내가 이 둘에게 열광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그때부터 그들처럼 되기로 결심하고 설계해왔다는 뜻은 아니다. 마흔 살 넘어 내가 소급적으로 찾아낸 이상적 자아가 아이젠만과 타푸리인 것이고, 이들에게 투영된 나의 욕망은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저항은 너무 거창한 말 같고 삐딱한 시비 걸기라고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내가 시비를 걸고 싶은 대상은 ‘짓는 조경’이었다. 모두가 디테일의 완성도, 장소의 실체적 경험, 사람들이 잘 쓰는 공간, 아름다운 식재, 이런 것을 설계적 지향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이는 설계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조건이지 설계의 지향이 될 수 없다. 짓는 조경은 쓸데없는 이론적 강박과 난해한 개념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본질에 충실한 조경처럼 보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조경은 자칫 어떠한 비판 의식도, 지향점도 상실한 채 도구적 가치만 남은 종속적인 조경이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예쁘게 잘 지어지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조경은 자본에 예속되든, 정치적 선전으로 전락하든, 도시와 환경의 구조를 왜곡시키든, 아무래도 상관 없는가. 물론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소몰(Robert Somol)과 와이팅(Sarah Whiting)이 ‘쿨’한 시대라고 정의한 오늘날 그런 질문 자체가 시대착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뜨거웠던’ 시대의 영웅인 아이젠만과 타푸리를 내 설계의 상상적 자아로 소환한 것은 조경 신(scene)에서 한 명 정도는 시대 착오적으로 이론과 설계의 관계를 떠들고 다닐 필요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I(A) 자아이상
롤 모델은 어디까지나 어린 시절의 통과 지점일 뿐, 자신이 결국 롤 모델 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래서 주체가 욕망하는 궁극 적 목표는 상상적 대상에 투영되었던 상징적 자아가 된다. 지제크Slavoj Žižek는 정확히 우리가 타인을 모방할 수 없는, 유사성을 벗어나는 지점 의 동일시가 자아이상이라고 설명한다.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된 설계적 자아는 단순히 그 누군가의 사유와 방식을 따라하거나 특정 현상 에 대한 비판에 머물 수 없다. 모방과 비판을 통해 도달하려는 지점은 보다 구조적인 것이다. 모순을 통해 나의 설계적 자아가 도달하려는 곳은 정확히 내가 짓는 조경을 비판하는 지점인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짓는 조경에 시비를 걸었다고 해서 짓는 조경이 패배해 다른 형식의 조경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비판하는 지점은 둘 중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다. 다시 말해, 내가 추구하는 조경은 ‘짓는 조경’과 함께 그와 반대되는 ‘개념의 조경’이나 ‘이론의 조경’도 공존할 수 있는 조경이다.
우리는 상반되는 지향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 양립 불가 능한 상황을 모순이라고 한다. 인간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변증법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발명했다. 헤겔에 의해 정교화되고 마르크스에 의해 교조화된 변증법은 현대 사회 체계를 구축한 가장 효과적이며 명증한 작동 기제가 됐다. 그러나 정과 반의 모순을 종합해 새로운 합으로 나아간다는 변증법은 모순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차이를 소거했다. 변증법에서 모순의 해결은 실상 모순을 없애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정과 반의 종합이 아닌 정과 반 하나의 선택이며, 결과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다른 하나의 제거를 의미한다. 그래서 변증법의 시스템이 작동하면 할수록 차이는 제거되고 지향은 균질해진다. 균질해진 지향은 사유를 정지시키고 이는 교조화된 폭력이 된다. 이론이 설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짓는 설계를 지향했지만, 다시 이론을 죽인 시대에 짓는 설계는 또다른 구속이 된다. 그래서 나의 설계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대상은 변증법적 설계이며, 반대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차이의 설계다.
모순의 길
내가 지향하는 모순지도는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설계다. 서로 상충하는 두 개념, 혹은 두 요소의 차이를 존속시키는 방식의 설계다. 사실 모순은 설계에서 특별한 개념이 아니다. 모든 설계는 모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문제와 모순은 다르다. 문제는 기능적 해결을 요구한다. 모순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배수가 잘 안 되는 땅을 물이 잘 빠지도록 바꾸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모순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마른 땅과 젖은 땅의 모순이 있다. 젖은 땅을 없애면 문제와 함께 마른 땅과 젖은 땅의 차이도 제거된다. 하지만 물이 안 빠지는 땅에 연못과 정원을 만들면 차이를 없애지 않고도 모순을 공존시 킬 수 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설계 행위다. 그러나 같은 설계는 아니다. 설계를 통해 전자는 가능성이 제거된 땅이 되고, 후자는 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미 잠재하고 있었던 새로운 공간이 된다.
모순지도의 원칙이나 방법을 물어본다면, 아마도 그런 건 없을 것이다. 방식이 아니라 태도이며 지향이기 때문이다. 내가 변증법의 문제를 비판해온 여러 사상가에게서 얻은 한 가지 가르침이 있다면 새로운 사유의 길은 늘 과거의 사유에 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없던 것에서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이들이 알려준 진리였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얻은 교훈이라는 점이다. 모든 땅의 문제와 일의 조건은 다르기 때문에 설계의 보편적 규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된다. 모순을 공존시키는 설계는 결국 차이의 설계이며, 그 길의 반대편은 획일성과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영민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설계를 하는 조경가이며, 글을 쓰는 사람이다. 서울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다. 미국에서 도시설계와 조경설계 실무를 하고, 여러 나라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론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설계를 추구하며, 설계를 각성시킬 수 있는 이론과 비평 작업을 해나가고자 한다. 대표 프로젝트로 ‘행정중심복합도시 도시상징광장’, ‘새로운 광화문광장’, ‘파리공원 리노베이션’ 등이 있다.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 등 십여 권의 책을 썼고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과 함께 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