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장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햇병아리 시절에 출근 루틴이 있었다. 당시 막내라서 가장 먼저 출근해, 환기를 시키고, 간단히 사무실 청소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청소가 끝나면 창가와 가까운 내 자리에 앉아서 사무실 창밖 풍경을 온전히 감상했다. 넓은 통창이라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보였는데, 날씨가 맑을 때는 하늘의 구름이 금방이라도 사무실로 흘러들 것만 같았다. 물론 정수리를 향해 내리쬐는 여름의 직사광선과 뼈를 긁는 겨울의 한기를 피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도심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단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괘념치 않았다. 첫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소소한 낙이었다.
창밖 풍경을 즐기는 건 21세기 시민에게 당연한 일이지만, 17세기 영국에서는 창밖 풍경은 누리기 힘든 사치였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는 세수 부족을 이유로 창문에 세금을 부과했다. 당시 유리 가격이 매우 비쌌는데, 좋은 집일수록 비싼 유리 창문도 많을 것이라는 이유로 창문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갔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건물주들이 창문을 합판이나 벽돌로 막아버렸고, 이로 인해 당시 많은 영국인이 우울증을 호소했다. 덕분에 햇빛과 공기에 물리는 세금이란 오명을 얻었다.(각주 1) 이웃 나라인 프랑스도 이 세금을 거두었는데,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한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창문세가 지목되기도 했다. 창밖 풍경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사가 증명한 것이다.
건축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인 마테오 페리콜리(Matteo Pericoli)도 일상 속 도시의 창밖 풍경에 주목했다. 그는 『창밖 뉴욕』(2013)을 통해 63인의 뉴요커가 바라본 뉴욕의 창밖 풍경을 담아냈다. 소설가, 작곡가, 사진 작가 등 다방면에서 활약 중인 문화 예술인들의 창밖 풍경을 담아낸 이 책은 각자 직접 쓴 글과 마테오가 그려낸 풍경이 하나로 어우러져 뉴욕의 도시 경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벽사이로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오렌지 빛 노을, 암벽처럼 느껴지는 도시의 아파트, 시적 영감이 되는 거리의 풍경, 추억이 깃든 가게 등 다양한 형태의 창문으로 뉴욕을 바라본 그들이 느낀 소회와 다양한 관점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매번 아름다운 건 아니다. 가령 쓰레기차에서 올라오는 냄새라든지, 뇌를 녹일 듯한 직사광선 등 창문 때문에 불편함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일상의 표정을 담고 있는 창밖 풍경을 건축 평론가 폴 골드버거(Paul Goldberger)는 이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게 무엇이든 창밖에 있는 것들을 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바꿀 수 없으므로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창밖 풍경은 친구 같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창밖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를 막을 수 없고, 경관을 가리는 건물을 맘대로 없앨 수 없다. 우산을 안 가지고 왔을 때 예고 없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낙비는 운치가 있지만 퇴근길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 없다. 창밖 풍경은 뽑기 기계처럼 내가 원하는대로 선택하고 해결할 수 없기에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포기에 가까운 인정이 아니라, 너그러운 아량에서 비롯된 인정이라면 어떨까. 마지못해 끌려가는 패키지 관광이 아니라, 창밖 경관 그 자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감상이 이뤄지면 어떨까.
이러한 태도는 이번 호 특집에서 다룬 김영민 교수가 중요한 지향점으로 삼는 ‘모순지도’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차이를 무작정 해결하려는 것보다 차이 그 자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설계를 추구하는 것처럼 저 창밖 경관이 주는 낭만과 불편 사이에서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새해 작은 소망이 있다면 일상 속 창밖 풍경을 잘 담아내고 싶다. 그게 글이 될지, 사진이 될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다짐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연말엔 2024년을 기억할 수 있는 몇 개의 창밖 풍경이 남기를 바라본다. 정확히는 나의 일상 속에 소소한 낙이 다시 한번 깃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