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에는 정답이 없다
설계 교육 현장에서 교육을 시작한 지 만 1년, 조금 더 거슬러 올라 설계 실무의 현장에서 관리자로 설계 팀원들을 이끌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어떤 분야보다 조경설계는 그 과정에서 순행과 난행을 반복하고 성취와 실패가 항상 공존하기에, 미로와 같은 설계 과정을 걸어가면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나 어렵사리 도달한 결승선에서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을 때면 위로와 탄식을 섞은 이 한마디가 들려온다. “설계에는 정답이 없다잖아.” 이 말에서 느껴지는 정답의 부재라는 공백은 작은 내려놓음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느껴지는 무상함은 자칫 설계 교육의 교육적 효과도 희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질까 두렵다.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설계 과목의 교육적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설계 행위에는 정답이 있는지 없는 지 믿음의 부재를 품고 있는 표현일 것이다. 조경학 교육인증제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고 있으나 그 실현 여부에 대해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조경 교육에서 가장 큰 덩어리인 조경설계 교육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몽타주가 정해진 답 없이 흐릿하기때문일지 모른다.
설계 교육에는 정도가 없다
설계 교육, 설계 과목에 대한 모호함 이상의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은 보통 공유된 기본 지식과 개념이 서로 어긋날 때 발생한다. 하지만 방법론도 열려 있고 정해진 교과서도 없는 설계 교육은 그 공유 기반이 얕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대화와 가치 판단을 수반하는 설계 과목의 소통 방식은 왜곡된 인식과 기억을 남긴다. 설계 업계에 대한 고착된 인식과 괴소문은 설계 작업을 통한 학습과 성취보다는 설계 분야와 학생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어긋난 설계 교육에 대한 이미지를 교육인증제를 기회로 바로잡고 전국의 모든 학과‧전공들이 공유해 정도(正道)로 삼을 만한 설계 교육의 정도(正度)는 무엇일지 구체적인 육하원칙으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주인공은 누구인가
먼저 설계 교육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누가 설계 과목의 주도자이고 주체적 의식을 가진 주인인가. 이 질문이 어쩌면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시작이자 끝일지도 모른다. 교육의 패러다임이 실증주의에서 구성주의로 넘어오면서 학습은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탐구, 해석, 창조하는 과정이고, 학습자가 주체가 되어야 하고 교수자는 촉진자, 조정자의 역할이 된다. 하지만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마스터와 학생을 수련공으로 삼는 도제식 교육이 여전하고, 전통적인 유교 사상으로 인해 사제 간의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과 교수자 의 위계가 아직도 공고하다.(각주 1) 리뷰, 발표 시 크리틱은 틀린 부분을 지적 받는 과정이 아니라 조금 더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내어 주는 색다른 방향에 대한 제안의 의미가 더 커야 한다. 수업을 디자인하는 설정자가 교수자지만 교수자는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다른 생각도 있음을 일깨워주고, 비평적인 시각으로 비난이 아닌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비평을 제시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설계 교육의 주인공인 학생 개개인의 자기 주도적 진로 설정을 돕는 것이 설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언제 할 것인가
언제, 어떤 주기로 교육을 하는가도 생각보다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점이다. 보통 설계 교육은 폭발적 양의 과제, 매주 도전적 과제의 연속이라는 학생들의 인식이 만연하고, 그 과제는 수업 외의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 학교의 현실이다. 물론 실습 시간을 배정해 두기도 하지만, 교수자와 학생의 상호 교환이 일어나야 하기에 상대적으로 긴 수업 시간이 부족하기 쉽다. 강사 수급의 어려움과 수업 편성 편의 등의 사정으로 강사 없이 주 1회로 한정되어 있는 대부분 학과의 상황에서는 조경학의 꽃인 조경설계 교육을 피우고 열매 맺기에 손길과 돌봄이 부족한 현실이다. 교육인증제를 통해 설계 수업이 한 주당 이틀 이상으로 배분되고 충분한 실습 시간이 편성된다면, 수강생들의 향상된 학업 성 취와 적절한 수업 참여의 호흡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설계 수업이 주말이란 세금을 늘 헌납해야만 하는 악독한 세리라는 악명에서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할 것인가
어디서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학생들의 설계 작업 공간인 스튜디오다. 스튜디오는 수업 때만 쓰는 일반 강의실과 구별된 다. 수업 시간 외에도 학생들 간의 상호 학습과 커뮤니티 활동이 함께 일어나는 상보적, 자생적 학습 공간이 된다. 건축학과 조경학 인증에서 필수적으로 학생 1인당 스튜디오 공간을 확보하는 기준이 있는 것은 확보된 물리적 공간이 성공적 교육의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재 국내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설계 수업에 필요한 다양한 자료를 정리하고 게시하여 깊이 있는 계획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스튜디오 공간 이 한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업 공간으로서의 스튜디오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 도구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실습할 공동 작 업 공간도 실내외에 필요하다. 또 다른 측면은 현장, 대지와의 관계다. 외부 공간을 다루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이 실내 책상과 모니터 앞에서 주로 진행되는 것은 역설적 상황이다. 대지에 대한 심층적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를 프로그램화하고 외부 기관과 연계로 현장 및 사회적 감각을 키우며 자연환경을 가까이서 자주 마주하게 하는 시스템과 학풍이 절실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스튜디오 수업은 IFLA 유네스코의 조경교육헌장과 유럽조경학과협의체ECLAS(European Council of Landscape Architecture Schools)의 조경교육지침이 명시하듯이, 조경 교육의 절반을 편제해야 할 만큼 핵심적인 교수 학습 방법이자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에 대한 논 의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ECLAS가 제시한 지침 에 의하면 스튜디오가 반드시 설계 교과목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스튜디오 수업은 현실의 문제와 교육을 이어주는 프로젝트 중심 수업이며, 주요 실무 분야를 학습자 중심으로 배우는 수업으로 제시된다. 또한 공학, 의학, 교육학 등의 분야에서도 스튜디오 수업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은 비설계 교과목에서도 스튜디오 수업 형식이 주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같은 형식을 적용할 핵심 교과목들을 선별하고 학생 진로와 연계한 방식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각주 2) 스튜디오 수업의 효능과 범위를 넓히는 방향을 교육인증제의 한 축으로 삼아, 조경을 둘러싼 다양한 이론 수업과 연계를 맺고 새로운 스튜디오 수업을 발굴해 이론적 지식이 어떻게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수진 내부의 긴밀한 협조 체제, 타 전공 및 외 부 기관과의 유기적인 기획 체계가 필수적일 것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다음은 학부 교육에 있어서 특히 어려움이 따르는, 무엇을 대상으로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다. 설계의 단계적 빌드업을 위해 작은 스케일의 정 원형 과제에서 시작해 점점 더 복잡하고 넓은 대상지로 확장해가며 교육 과정을 편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 학부제의 일반화와 자율전공에 대한 지향으로 전공필수 과목이 줄어들다보니 연속적인 계획설계 과목의 시퀀스에서 다루는 대상의 유형이 축소되는 것이 학부 교육의 현주소다. 이와 반대로, 동시대에 조경 분야의 실천과 연구 대상으로 요청되고 있는 프로젝트들과 사회적 이슈들은 기본 유형을 넘어선 복합 적 대상으로의 확장과 다학제 전문 지식들의 융합을 요청한다. 기본형 설계 과제도 수업에서는 기본계획 수준으로만 그친 채 설계 스펙트럼의 좁은 부분만 다루는 실정이 수십 년째다. 설계가 어떻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어떻게 실제 공간으로 지어지는지까지 포괄하는 디자인 빌드식 수 업으로의 확장이나 커뮤니티 베이스 디자인 등의 폭넓은 가능성과 실 효성에 대한 실천과 실습은 실무로 진출한 뒤 재교육이 되거나 학교 밖 에서 이벤트성으로 교육되는 것이 현실이다. 인증제를 기회로 설계 교 육 과정이 체계적으로 재정비된다면, 단축된 시간에 정통성 있는 설계 교육을 이수를 받고, 학부 고학년 때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확장적 성취를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는 체계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설계에는 정답이 많다
요즘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 있다. “설계에는 정답이 많아. 그 래서 처음에 조금 어려운 거야. 하지만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너희 들만의 답을 찾아봐. 그 과정을 나는 응원해, 우리 교수진이 도와줄게.” 정답이 없다는 편향된 해석을 초래하는 가설로 인해 오명을 쓰고 있는 설계와 설계 교육에 대해, 설계에는 정답이 무수할 수 있고 그래서 조금 어렵지만 자신만의 답을 찾는 공부와 스스로 성장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환영받는 분위기다. ‘없지 않고 있다’는 긍정의 표현 이라서만이 아니라, 왜 조경학 설계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하는 답 이 되기에 그렇다고 믿는다. 교육인증제를 통해 조경학과 교과 과정에서 학습한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동시대의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그 해 결책을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통합적 틀을 제공하는 설계 과목의 쇄신이 이루어진다면, 조경학도 모두가 자기 브랜드를 갖는 조경 전문가로 성장해 나가는 큰 동력이 될 것이다.
각주 1. 김아연, “조경설계 스튜디오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한국조경학회지』 38(2), 2010.
각주 2. 김아연, “조경교육에 있어 학습자 중심 스튜디오 수업의 쟁점”, 『한국조경학회지』 43(1), 2015.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랩디에이치(Lab D+H)를 로스앤젤레스에서 공동설립하여,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에 공공과 민간을 아우르는 크고 작은 오픈스페이스들을 만들어왔다. 현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조교수로 조경디자인성능연구실(ldpl)을 열었다. 『공원을 읽다』, 『용산공원』 등의 공저가 있고, ‘한강변 보행네트워크’, ‘상하이믹시몰과 공원’, ‘타임워크명동 공유정원’ 등을 설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