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출내기 에디터에게는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2016년 5월호)에 등장한 사람들이 멀고 신기했다. 나와 그렇게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데, 모두들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고, 먹고 살기 바쁜 나와 달리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고, 무엇보다 굉장히 열정적이었다. 박영석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어 놓고 물러나 있었다. 가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개입해 농담이나 웃음으로 사람들이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유도했다. 몇 달 뒤 용산공원 라운드테이블 1.0을 이끌게 된 박영석을 인터뷰했다. 주요 골자는 용산공원을 만들기 위해 청년 활동가를 모아 다양한 활동을 벌이겠다는 것이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건 ‘사람’이라는 키워드였다. 그의 말과 목소리에서 사람을 정말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공간이 필요한 이유도, 좋은 기획을 하려는 이유도, 모두 사람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박영석이 ‘유엘씨 프레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열었을 때에도 필진 소개란부터 뒤적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발행인은 어떤 사람과 책을 펴낼지 궁금했다.
발행인인 그를 에디터로서 인터뷰하러 갈 때 가장 궁금했던 건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지치진 않나요?”였다. 스스로 반성을 좀 할 필요가 있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지치죠. 하루에 몇시간씩 워크숍 진행하고 나면, 그날 회식 자리에서 말 한 마디 안할 때도 있어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도 업으로 삼으니 힘들 때가 있더라고요.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 내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면, 일부러 장난을 치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해요.” 인터넷에 떠도는 다정은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제는 뭐했나요?
질문지를 처음 받자마자 육아라고 메모했어요. 어제도 어김없이 육아를 했습니다. 요새는 삶이 제가 하는 일보다는 육아에 방점이 찍혀 흘러가는 거 같아요. 아이를 돌보는 일뿐 아니라 그에 관련한 공동체, 공동 육아를 지지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늘 기획자 역할을 하다가 이번엔 참여자가 되었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나요?
공동 육아를 하는 엄마, 아빠들을 줄여서 ‘아마’라고 해요. 현재 26가구의 아마가 있는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 많은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수행했는데, 제가 참여 워크숍에서 활동하는 모습은 생경하더라고요. 기획자일 때는 가장 좋은 이상적인 안, 현실적인 안, 경제적인 안, 합리적인 안을 도출하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 대안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너무 중시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안을 실천하는 건 해당 커뮤니티에 속한 참여자로서 플레이어인데, 그간 프로세스나 솔루션 그 자체에 더 공을 들인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워낙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서 어떤 질문으로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오래 전 이야기부터 해볼까 해요. 석사과정을 마친 후 독일 뮌헨에서 도시 공간과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접점을 탐구하려 했다고 들었어요. 일반적으로 택하는 유학 코스가 아니기도 하고, 연구 주제도 독특해요.
학부 때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은사님을 많이 만났어요. 고정희 대표님(써드스페이스 베를린), 정기호 교수님(당시 성균관대학교), 황재선 박사님, 이재문 박사님을 비롯해 일하면서 만난 분 중에도 독일에서 유학한 분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비슷한 결이 느껴졌었어요. 독일은 코스워크 없이 스스로 연구하고 탐구하는 식으로 공부를 한다는 게 멋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더 공부를 한다면 독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지역으로 알아보다가 뮌헨 공대에 있는 교수님과 연락이 닿아 비행기에 올랐죠.
연구 주제는 석사과정의 연장선이었어요. 석사 때 장소성 재생을 위한 미디어 공간 설계를 모바일 미디어를 중심으로 탐구했거든요. 이미 미디어 아트를 많은 곳에서 접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모바일 미디어가 급격하게 대중화되고 보급되면 개인이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각과 그 방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사진과 영상 콘텐츠를 더 쉽게 만들어낼 수 있고 공간이나 시간 제약 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스마트폰은 신체 감각의 확장기, 도시의 광역적 이해 증진, 인간과 공간의 유희적 인터페이스-새로운 아카이빙 수단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어떤 지역이나 공간을 더 광역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평이한 결론인데 그때는 제가 노벨상을 탈 줄 알았어요(웃음).
2011년 무렵, 아이폰이 국내에 처음 출시됐어요. 스마트폰으로 인해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일상에 빠르고 깊게 침투할 거라고 생각했죠. 당시 독일 스마트폰 보급률은 유럽에서 가장 빨리 늘어나고 있었고 관련 기술도 발달해 있어서, 이 기술을 통해 공공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기대했는데 제 예상이 빗나갔죠. 지금 되돌아보니 스마트폰이라는 게 결국 일상생활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들어주고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건 맞지만,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다르게 정의할 만큼 침투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였는지 연구계획서가 수차례 바뀌었어요. 그 과정에서 다루고자 한 연구 내용도 조금씩 달라졌죠. 연구 주제를 새롭게 바꾸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한국에서 ‘노들꿈섬 운영구상 1차 공모’에 함께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죠.
그때가 큰 전환점이 아닌가 싶어요.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 특집에 노들꿈섬 공모 당시 이야기가 실렸더라고요. 준비하며 여러 사람을 만났고 “이때의 만남과 대화는 조경가로서 도시를 공간적인 행위만으로 접근하려던 관점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했었죠. 그 변화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어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당시에도 참여라는 키워드가 중요했고, 도시계획과 공간 계획 측면에서 이용자의 의견이 설계에 반영되는 게 큰 흐름이었어요. 오픈스페이스처럼 공공성이 대두되는 곳은 더욱 더 중요했죠. 노들꿈섬 공모 준비를 함께한 김연금 소장님(조경작업소 울, 이하 모두 당시 소속), 문정석 소장님(소셜디자인랩), 박혜리 소장님(KCAP)에게 많이 배우고 영향을 받았죠.
사람을 만나는 일과 여러 부수적인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책이나 논문에서 읽은 것을 토론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진짜 사람들을 만나 도시에 대해 대화하고 함께 호흡한다고 느꼈어요. 그 과정에서 깨달은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소수의 엘리트가 설계하고 시공하고 관리하는 시대가 저물고 다수의 시민이 함께 이니셔티브를 구축하고 그 과정을 꾸리며 다 같이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는 거예요. 둘째는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 있지만 과정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과정은 실패로 남지 않고 경험이 되더라고요. 지난 번에는 파란색을 많이 써서 이런 결과가 도출되었으니 이번에는 빨간색을 많이 써보자 하는 식으로, 과정 자체가 새로운 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거나 전략이 되어줄 수 있더라고요. 마지막으로, 깊은 고민이나 오랜 연구도 중요하지만 우선 시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에요. 생각은 크게 해야 하지만 작은 실천이 있어야 변화가 시작되죠. 노들꿈섬 공모 팀 이름이자 법인명인 ‘빅바이스몰(Big by Small)’이 그 의미를 잘 보여주죠. 이 관점은 지금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박영석이 하는 일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인 것 같아요. 특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를 풀어내는 일이요. “조 경가로서 공공 공간을 대하는 태도와 접근 가능한 전략을 바 탕으로 도시와 지역, 공간과 장소, 개인과 공동체, 기억과 표 현에 관한 모든 작업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했다”(『환경과조경』 2016년 5월호)고 말한 적도 있죠. 언뜻 쉬워 보이지만 다양한 목 소리를 담고 풀어낼 때 경계해야 할 점들이 있을 것 같아요.
저 스스로를 제일 경계해요. 약속을 잡고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 오늘 상대가 풀어내는 거 한 판 다 듣고 오자하고 마음을 다잡죠. 되도록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요. 사람들은 대부분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에 가득 품고 살더라고요.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것 같은 사람도 어떤 물꼬만 트여주면 술술 이야기를 풀어놔요. 모든 이야기가 영양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나면 중요한 알맹이들이 나오기 시작해요. 우리 모두 바쁘게 살다보니 짧은 시간에 콤팩트하게 필요한 것을 뽑아내려 할 때가 많잖아요. 필요한 답변만 취하려 하면 결국 중요한 내용을 놓치게 되더라고요.
‘용산공원 라운드테이블 1.0’ 활동을 흥미롭게 봤어요. 그중 에서도 ‘공원산책’(2017)이 참 좋았는데, 공원을 조경가 혹은 전문가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대중의 관심과 공감은 저 렇게 끌어내는 거구나 싶었거든요. 기획 배경이 궁금해요. 참고한 사례가 있다면요?
2016년에 김연금 소장님과 함께 서울시에서 공원산책이라는 프로그램 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서울의 대형 공원 다섯 군데를 선정하고, 공원 을 설계한 조경가와 함께 걸으면 이야기를 나눴죠. 반응이 열렬했어요. 신청 페이지를 열자마자 30시간도 안되어서 모든 회차가 매진됐죠. 그 동안 왜 사람들을 공원에서 만나 이야기할 생각을 못했나 싶더라고요. 산책을 가기 전 시민들이 공원을 더 깊숙이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 도 진행했어요. 조경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은 공원이 어떤 이유로 설계 되었는지, 벤치는 왜 이곳에 설치되었는지, 동선이 왜 이렇게 뻗어있는 지, 바닥 소재는 왜 돌인지 등 공원 설계의 디테일에 대해 알지 못하잖 아요. 공원이라는 공간이 전문성을 갖고 체계적으로 설계되고, 그에 따 른 이론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조경가 역시 자신의 설계 의도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고요. 그래서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를 먼저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워크북으로 만들었어요. 그 질문과 답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시민들에게 공원에 대해 설명하도록 했죠.
공원산책이 공원도 설계의 대상이라는 걸 알리는 데 효과가 있었다고 보나요.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고 생각해요. 또 굳이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20대에 겪었던 일인데, 친구를 만나러 가 다가 서울어린이대공원을 지나친 적이 있어요. 도로 한쪽에 차가 줄지 어 서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날이 어린이날이었어요. 그중 한 차에서 자녀와 어머니가 내리는데,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가 “가서 좋은 그늘 하 나 잡아놔”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좀 놀랐어요. 사실 우리가 공원이 나 공공 공간을 여러 이론과 전략을 통해 설계하지만, 실제로 이용자에 게 중요한 건 설계 논리보다 자신에게 편안하고 이용하기 좋은 쓸 만한 그늘 하나잖아요. 형이상학적 가치나 공간에 담긴 메시지보다 그 장소 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결국 사람의 기억에 남겠죠. 공원 설계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어떤 노력과 과정을 거쳐 공원이 만들어졌는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자신의 주변, 동네 공공 공간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을 테니까요.
도시와 공원 등 어떤 대상지를 이해할 때 다양한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잖아요. 세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작은 골목 단위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도시 맥락 차원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하는 곳인지에 먼저 집중하기도 하고요. 어떤 순서로 대상지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하나요?
앞서 답변한 공원의 그늘과 맥이 닿아 있는데, 결국 제게 와 닿은 건 장 소라는 개념이에요. 공간과 장소를 바라보는 관점이 굉장히 다양하지 만, 두리뭉실하게 정리해보면 공간은 물리적 경계의 끝이 있고 영역성이 확고하며 규격이 있는 곳이더라고요. 장소는 좀 더 인문학적 측면에 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거나, 형태가 없는데도 자신만의 감각으 로 인지되는 곳을 칭하기도 하고요. 졸업식을 알리는 현수막을 만들어 야 한다면, 장소와 일시라고 적지 공간과 일시라고 쓰지는 않잖아요. 어 떤 특별한 사건을 겪으며 공간이 나의 장소가 되는 거죠. 그 과정이 좋 아요. 그래서 어떤 공간이나 대상지에 갈 때, 이곳이 나에게 장소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곤 해요. 반대로 컨설팅을 하러 갈 땐, 이곳을 누군 가에게 잘 팔리는 장소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고요.
2019년 유엘씨 프레스ULC Press를 창간했죠. ‘창간’이라는 표 현이 적당한지 조금 고민했습니다. 처음 홈페이지가 공개되었 을 때는 웹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을 지향한다 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필진이나 큐레이션 방식도 남달랐고, 영상 콘텐츠도 많았고요. 처음에 구상했던 유엘씨 프레스는 어떤 모습인가요? 가장 먼저 떠올린 코너가 있다면요?
대학원에서 지리학과 이정만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유엘씨 프레스 라는 형태의 플랫폼을 구성하게 됐어요. 그 수업의 모토가 완벽한 발표 가 아니더라도 괜찮으니,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읽고 한 사람당 한 마디 씩은 하고 돌아가자였어요. 서른 명 남짓한 학생이 듣는 강의였는데, 보 통 대학원 수업이면 서로 이야기도 잘 안하고 자기 발표와 질문 답변에 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교수님이 계속 수다를 떨자며 분 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주니까 한두 명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죠. 잡 담처럼 꺼낸 이야기를 다음 사람이 받아주며 점점 두터워지고, 소위 말 하는 담론이 쌓이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찾기도 하고 요. 엄청 흥미로웠어요. 다 같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많은 정보와 의견이 축적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죠. 이후에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하던 임한솔 박사와 신명진 박사에게 ‘유엘씨 프레 스’라는 일을 벌여보지 않겠냐고 꾀었어요. 유엘씨 매거진에 꼭 들어가는 꼭지가 라운드 테이블이에요. 필진, 편 집진 모두가 모여 다 같이 대화하는 내용인데, 이 라운드 테이블이 유엘 씨 프레스의 모티브에요. 유엘씨는 어반 랜드스케이프 카탈로그(Urban Landscape Catalog)의 약자인데, 카탈로그에 나름 의미를 두었어요. 물건 을 팔기 위해 제작하는 게 카탈로그인 것처럼, 시민들을 소비자라고 상 정했을 때 도시에서 아직 팔리지 않았거나 또는 잘 팔리고 있는 상품으로서 공공 공간과 경관을 소개하는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의미를 담았죠. 많은 실험을 거치는 중이에요.
요새 잡지 에디터로서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해외 조경설계사무소에서 프레스 키트에 동영상을 포함해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거든요. 유엘씨 프레 스가 최종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 역시 ‘잡지’라는 형태의 인쇄 매체에요. 이야기를 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글과 사진을 포함한 인쇄물의 형태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소위 영상 우점의 시대잖아요. 이미 영상 콘텐츠가 많은 상태에서 굳이 비슷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만들 필요는 느끼지 못했어요. 미디어 종 다양성을 편협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영상이 대세가 된다하더라도 저는 텍스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극놀이에 프리텍스트pretext라는 개념이 있어요. 예를 들어, 테이블 위에 놓인 종 이컵이 해적의 망원경이 되기도 하고 인류에 마지막 남은 물을 담은 컵이 되기도 해요. 즉,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거나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최초의 물리적 소재를 뜻하는 말인데, 어미에 텍스트가 붙어있듯 이 용자가 개입할 여지를 준다는 점이 글의 성질과 비슷해요. 반면에 영상 이나 사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형태를 제시하죠. 크리에이터가 원하는 곳만을 가장 예쁘게 다듬어서 보여줄 수도 있죠. 글은 좀 더 날 것의 느낌이 나고, 빈틈이 있어서 그 부분을 제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도 있어요. 또 영상이 아무리 득세를 하더라도 리터러시literacy 측면에서, 공간을 이해하는 문화의 관점에서 텍스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간을 소개할 때 사진이나 영상으로 호도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근데 텍스트는 좀 더 건조하고 단순하기도 해서 오히려 사람들을 더 기대하게 만들고 덜 실망시키는 면도 있어요. 예쁜 사진과 영상으로 공간을 더 빠르 게 팔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는 그 공간의 가치와 의미, 재미를 더 빨리 소진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잡지를 만드는 만큼 인쇄 매체를 읽는 것을 좋아하나요?
좋아하는 잡지나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 세요.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이라는 여행 가이드북이 있어요. 한 권에 하나 의 나라나 도시를 다루는데, 독특하게도 사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소 개해요. 대부분의 필진이 여행 작가들인데, 지도에 밥 먹을 곳, 놀 곳 등을 표시해놓고 간단한 설명을 달아놓아요. “이 도시에 와서 이 바에 가지 않으면 이 도시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 “이 나라에서 이곳만큼 맛 이 뛰어난 핫도그는 없을 것이다.” 이런 문장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공간을 떠올리게 되고 당장 가보고 싶어져요. 막상 가서 보니 설명과 다른 경우도 있었지만, 그게 실망이 아닌 경험의 증폭으로 느껴지더라고요. 도시와 지역, 공간 구조를 상상하게 만들고 걸어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좋아하는 책이에요. 잡지의 경우는 당연히 『환경과조경』을 좋아하고(웃음), 최근에는 공동 육아와 관련된 책을 많이 봐요. 필자와 배경이 다양해서 흥미로워요. 사실 공원이나 정원을 다루는 특집을 꾸리면, 걸어온 길이 비슷한 필자들을 섭외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공동 육아는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아본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에요. 그렇다보니 다양한 관점과 삶의 이야기가 다루어져 재미있어요.
필진 섭외는 어떻게 하나요?
편집위원들과의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누구의 글이 좋더라, 이번 포럼에서 발제한 누구의 발표 내용이 흥미롭더라, 하 는 얘기가 들리면 바로 연락을 해봅니다. 아는 사람을 건너 건너면서 필진 풀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꼭 조경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분야를 넓게 보며 새로운 글쓴이를 발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티클 분류 기준이 숏, 톨, 그란데에요. 커피 사이즈처럼 글 분량에 따라 구분을 했는데 이유가 있나요?
분량에 상관없이 다양한 글을 싣기 위해 나눈 카테고리에요. 숏은 특히 짧은 글도 상관없으니 사람들이 많이 투고해주길 바라며 만든 분류이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짧은데 울림을 주는 글을 좋아해서 숏 카테고리를 아끼는 편입니다.
기획, 편집, 발간까지 어떤 사이클을 통해 매거진을 만들고 있나요? 분기별로 발행되는 만큼 주제 선정에 공을 들여야 할 것 같아요. 트렌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지만, 잡지가 완성될 때까지 그 관심이 계속되어야 하잖아요.
유엘씨 프레스 발간 주기가 좀 복잡해요. 봄과 가을에 발간되는 정규호에는 숫자가 붙어 나와요. 단행본처럼 기획되어 발간되는 특별호에는 알파벳이 붙어 나오는데 겨울에 내려고 노력하고 있죠. 발간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세 달 전부터 준비하는데, 텀블벅이라는 클라우드 펀딩에 기반을 두고 발행하다보니 최소한 한 달 전에는 구성이 확정되어야 하 더라고요. 주제 선정의 경우, 월간지도 시기적인 이슈를 다루지 못하는 상황이 잖아요. 화제가 되는 이야기도 시시각각 빠르게 바뀌고요. 그래서 저희 도 목차를 구성해놓고 계속해서 바꿔요. 처음에는 고정된 섹션을 만들고 유지해볼까 하다가, 4호를 기획하며 조경 분야의 사람 이야기를 담아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4호 ‘나의 조경 연구기’에는 조경 연구자 들의 이야기를, 5호 ‘조경 설계가의 하루’에는 조경 설계사무소를 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을, 6호 ‘조경 시공의 최전선’에서는 조경 시공자가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아 일종의 조경 트릴로지를 만들었어요. 창 간준비호, 정규호, 특별호를 포함해 지금까지 발간한 책이 딱 열 권이더 라고요. 이 시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서 가을방학을 갖기 로 했어요. 그 성찰한 내용을 겨울에 나오는 특별호 ULC D에 담을 예 정입니다. 현재는 큰 틀에서 구성을 조정해나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 리뷰만큼 기쁜 일이 없어요. 독자 에게 받은 리뷰 중 기억나는 말은 없나요?
“조경을 전공하지 않아 공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알게 되어 유익했다”, “공원과 정원이 이렇게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지 몰랐다”, “조경이 예술 등 여러 학문과 교점이 있어 보인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짜릿했습니다.
미디어 매체가 다변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반드시 지키고 자 하는 유엘씨 프레스만의 기조가 있다면요?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아직 뚜렷한 색이 있다기보다는 실험을 거듭하고 있어요. 이 실험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안 끝날지도 모르죠. 실험의 중간 결과물을 통해 새로운 실험을 하거나 결과값을 보정하는 일을 계속하려 합니다.
유엘씨 프레스에 쓴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기억이 베어든 장소와 그곳에서 느낀 감상이요. 한 서평에서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을 특별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 삶을 두텁게 만드는 새로운 보물창고를 여는 것과 같다”(서평: 일상연습-당신의 일상은 익숙한가?)라는 문장을 읽고 나니 더욱 더요. 이런 성향이 언제부터 발현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적부터 메모광이었어요. 중학생 시절에는 힙합에 빠져서 가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일상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좋은 표현을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늘 주머니에 종이와 펜을 넣어 다니면서 기록하고 꺼내보곤 했어요. 시도 때도 없이 메모를 하니까 함께 성당에 다녔던 동생이 미사 시간에 뭘 그렇게 적냐고 물어보기도 했고요. 요새는 주로 스마트폰에 메모를 하거나, 어느 종이에든 적은 메모를 사진으로 찍어 자료화하는 식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어요.
박영석이라는 이름 뒤에 붙일 수 있는 직함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요. 대표, 소장, 기획자, 퍼실리테이터, 발행인. 그중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직함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예시로 들지 않은 어떤 단어를 말해주셔도 좋습니다.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해왔는데요. 종국에는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로 불리기를 바랍니다. 공간과 사람 사이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 또는 풀어 낼 대화들이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특히 공공 공간은 조성하고 나면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그 쓰임은 늘어나는 데 반해 그간의 과정이나 이후의 방향에 대한 소통이 늘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공간과 사람 사이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잘 흐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설계하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궁금합니다.
좋은 선배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는 건 어 려울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먼 훗날에는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선배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아이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은 마음도 커요. 주변의 좋은 선배에게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에 저 또한 베풀고 싶어요. 요즘 드는 생각 하나를 덧붙이고 싶어요. 가령 예전에는 백 명을 위 한 집을 지었고, 천 명의 끼니를 책임지는 식당이 있고, 일만 명이 오 갈 수 있는 공원을 만들었다면, 최근에는 오십 명 정도의 사람이 이백 끼 정도의 식사를 하고 공원에는 천 명 정도가 다녀가는 것 같아요. 다 시 말해 도시 경관의 이용성이나 유용성, 경험의 결과 폭이 대폭 축소 된 것 같아요.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일 수도 있지만, 생활 방식과 사 람들의 소통 방식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대동대이(大同大異)라는 말을 열심 히 쓰고 있어요.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일상 공간은 외형적으로 비슷하 지만, 사회적 상황과 대중의 의식은 크게 변한 현상을 빗대어 지어냈어 요. 내 아이가 한창 도시와 동네를 쏘다닐 무렵에는 대동대이 사회가 한 결 성숙해져서 나름의 재미와 흥미로 가득한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막연하지만 제가 벌일 수 있는 흥미로운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 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좋은 선배 같은 아빠가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 일 거예요.
박영석은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공공 공간 공론화 설계, 놀이 환경 연구, 도시 문화 콘텐츠 기획, 정원 컨설팅 및 소재 연구를 하며 유엘씨 프레스(ULC Press)를 발행하고 있다. 빅바이스몰(Big by Small) 공동대표이자 플레이스온(Place_On) 소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