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강은 서울 중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대표 경관이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도성에서 족히 4~5km는 걸어 나와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많아 복잡하고 정신없는 성안과는 달리, 한강 일대는 강 하류 특유의 한적하고 유유자적함이 있었다. 강 하구인 탓에 유속은 느리고 강폭도 약 1km나 됐고 백사장 풍경은 아름다웠다. 도성과도 가까워 예로부터 시인 묵객과 화인 가객이 즐겨 찾았는데,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들에게도 한강은 꼭 한번은 들러볼 만한 명소였다.
1539년 명나라 사신 화찰(華察, 1497~1574)은 조선을 방문하던 중, 통역사의 권유로 한강을 유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현장의 느낌을 『유한강기(游漢江記)』로 남겼다. “내가 장막을 들어 올리고 보니 남산이 눈앞에 보이고 북악산이 뒤에 있으며 용산과 필운대가 좌우로 어리어 비치고 잠두봉을 비롯한 여러 봉우리가 천태만상으로 들쭉날쭉하여 완연히 그림과 같았다(予搴帷視之, 則見南山在前, 北嶽在後, 龍山弼雲, 映帶左右, 蠶頭諸峰, 起伏萬狀, 宛然如畫).” 양화나루까지 가려던 배가 갑자스러운 바람에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한강의 기가 막힌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풍경에 감동한 화찰은 바로 양화나루행을 취소하고 그 자리에서 연회를 열고 뱃놀이를 즐겼다.
진경산수화의 종주이기도 한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은 1741년부터 1759년까지 서울 근교의 명승을 그린 그림들을 모아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를 엮었는데, 수록된 33점의 그림 중 무려 20여 점이 한강이 주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현령으로 있었던 그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양수리의 전경을 그린 ‘독백탄(獨栢灘)’과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월드컵공원이 들어선 난지도 일대를 묘사한 ‘금성평사(錦成平沙)’, 해 지는 안산(鞍山)(무악산)과 한강의 모습을 담은 ‘안현석봉(鞍峴夕奉)’ 등, 겸재는 한강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경점(景點)들을 우리에게 전승해주었다. 지금의 우리가 한강의 옛 풍경을 감히 상상해 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가 남긴 그림 덕분이다.
한강의 이러한 심미적 가치는 서울의 근대화와 함께 사라지거나 변질됐는데, 그 첫 시작은 한강철교의 건설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제물포(인천)의 존재감이 급부상했고 급기야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건설까지 견인했다. 이 철도 건설에는 한강의 이남과 이북을 이어야 하는 난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한강철교의 건설 배경이다.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한강에 대규모 철교가 들어서게 된 전례 없는 광경은 보는 이들에게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지금의 한강철교는 총 네 개의 교량으로, 철도와 수도권 전철의 복선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한강철교 건설을 처음 추진했던 대한제국 정부는 선박이 지나갈 수 있는 도개교로 하고 사람들이 보행할 수 있는 보도까지 설치할 것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철도와 교량 부설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계획은 변경됐고, 1900년 7월 철교 하나를 완공하면서 마무리됐다. 대신 1917년에 인도교 하나를 별도로 가설하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한강대교다. 한강철교와 인도교는 단순히 한강의 풍경을 근대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철교 남단의 영등포 일대를 자족의 공업도시로 개발했으며 서울의 행정구역 경계를 확장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 환경과조경 426호(2023년 10월호) 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京城府, 『大正乙丑の水災』, 1925
김종근, “일제하 京城의 홍수에 대한 식민정부의 대응 양상 분석: 정치생태학적 관점에서”, 『한국사연구』 157, 2012, pp.291~327.
이국진, “명나라 사신들의 한강 유람과 문학적 형상화”, 『한문고전연구』 25, 2012, pp.7~42.
이영민, “개항 이후 경인지역의 역사지리적 변화와 경인선 철도의 역할”, 『지리교육논집』 49, 2005, pp.285~299.
그림 출처
그림 1.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