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모두 사라진 도시는 어떤 모양일까. 디스토피아 영화 속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조차 사라진 도시의 모습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동네 풍경 하면 떠오르는 건 주로 건물들이다. 통유리를 두른 오피스텔,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 시멘트 담을 세운 단독주택, 전단지가 붙은 전봇대와 줄지어 선 불법 주차 차량, 길고양이를 위한 밥그릇들.
나의 동네는 “이름은 청량했지만, 시원하게 트인 하늘을 볼 수 없었던 곳”(14쪽)과 아주 가깝고 환경이 비슷하다. 그래서 나도 조각난 하늘을 보고 산다. 슈퍼문을 보기 위해 옥상에 오르면 아파트에 달이 가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 이리저리 몸을 기울여야 한다. 이따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동네는 어떻게 생겼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알지만 그것이 이어져 어떤 선을 그리는지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열린송현녹지광장(이하 송현광장)에서는 어렴풋하게 발을 딛고 선 도시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빈 터를 감추고 있던 4m 높이의 벽을 1.2m로 낮추고 잔디와 야생화로 단장한 송현광장은 주변을 360도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건물 사이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도시를 감각하게 된다. 축구장의 약 5배에 달하는 넓은 녹지는 서울의 배경이라는 산들이 도시와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는지, 4차선 도로가 얼마큼 넓은지,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얼마나 고불고불한지 새삼 느끼게 한다.
최근 이곳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현장프로젝트 장소로 사용되는 중이다. 취재를 하러 가며, 휴관일이 언제인지 문은 언제 닫는지 확인하지 않은 게 아주 오랜만이었다. 물론 ‘하늘 소’에 오르거나 특정 파빌리온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전시 구조물은 언제든 볼 수 있다. ‘하늘 소’에 오르면 주변 산세와 송현동의 전경을 넓게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땅 소’에 더 마음이 갔다.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언덕의 굴곡이 흥미롭게 느껴지고, 아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그 높이가 좋았다. 언덕 위에 뉘여 놓은 나무줄기 모양의 벤치에 앉으면,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던 정글짐에 오른 기분이 든다. 마음먹으면 쉽게 올라 적당한 넓이의 땅을 내려다볼 수 있는 다정한 높이. 벤치는 도심 풍경이 담기도록 파놓은 작은 연못을 향해 놓여있지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연못 앞에는 차도와 높다란 빌딩이 있지만, 뒤쪽으로는 넉넉한 녹지가 있고 옹기종기 자란 건물 사이로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공예박물관의 끄트머리를 슬쩍 엿볼 수 있는 까닭이다.
송현광장을 떠나며 한 번 더 이곳에 오고 싶다고 느끼게 한 또 다른 매력은 말끔하지 않은 녹지다. 정리되지 않은 듯이 마구잡이로 자란 풀이 허리 높이까지 올라왔다가 바닥으로 축 가라앉기도 한다. 사이사이의 꽃은 심긴 것이 아니라 정말 그곳에서 피어난 것처럼 자연스럽다. 과장을 보태, 꼭 인간이 만든 인공 구조물이 다 스러지고 몇 천 년이 지난 후의 땅을 보는 것 같다. 녹지 사이의 길도 돌이나 데크로 포장하는 대신 야자매트로 덮는 정도로 정돈했다. 비가 오면 물이 고이고 가끔 몸이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걷기에 나쁘지 않다. 벤치도 그냥 툭툭 놓여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야생의 녹지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이 모든 것들은 공원이 아닌 광장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 광장이 광장다울 수 있던 이유는 서울시가 임시 개방인 만큼 인위적 시설을 설치하기보다 최소한의 시설물만 배치한 덕분이다. 2024년 말 이후에는 ‘송현문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땅이 다시 닫힌다. 같은 녹지이지만 공원의 단정하게 정리된 화단, 수목, 깔끔하게 포장된 길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게 될 테다. “글은 좀 더 날 것의 느낌이 나고, 빈틈이 있어서 그 부분을 제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도 있어요.”(100쪽) 박영석의 말이 떠올라 아쉬워졌다. 공원과 광장이 다르다는 걸 다시 느꼈다. 이 틈새를 가능성의 땅으로 좀 더 오래 두어도 좋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이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누구나’에 포함되지 못한, 계단과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 없는 이들도 모두 편히 오갈 수 있는 공간으로. 엘리베이터 같은 간단하고 낭만 없는 해결책보다는, 더 완만하고 비스듬한 경사를 놓는 따뜻한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