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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 환경과조경 2021년 11월

이맘때면 귀신처럼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매서워진다. 옷장을 뒤엎어 정리하며 생각했다. 올해도 수능한파가 만만치 않겠구나. 십 년도 더 지났지만, 수능 하면 손안을 가득 채웠던 말랑말랑한 귤이 생각난다. 시험 응원을 온 동아리 후배가 핫팩과 함께 준 것이었는데, 건네받을 때 닿았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으면서 귤에는 따끈한 기운이 가득했다. 과일은 무조건 차갑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그 따뜻한 귤이 너무 좋았다. 점심 도시락을 비운 뒤, 그 작고 말랑말랑한 동그라미를 아껴가며 까먹었다.

시험 한 번 망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참 많이 떨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응원이 어마어마하게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뜻밖의 위로가 또 있었다. 언어 영역(지금은 국어 영역으로 바뀌었더라) 시험지 상단에 적힌 필적 확인 문구가 그것이다.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2006학년부터 도입된 제도인데 모든 수험생은 12~19자 사이의 짧은 문구를 답안지에 자필로 적어야 한다. 그해의 문구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한 구절이었다.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워낙 유명해 수도 없이 본 문구가 갑자기 낯설게 읽힌 까닭은, 시험지를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글자 중 이 열두 자만이 문제 풀이를 위한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의도, 숨은 뜻 같은 것을 다 내던지고 시를 시로, 소설을 소설로, 수필을 수필로 만날 수 있는 순간. 그게 뭐라고 마음이 찡하고 서러웠다. 물론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이 다시 나를 지문으로 뒤덮인 전쟁터로 내몰았지만.

애석하게도 무언가를 발견하겠다고 갈망하며 들여다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 때가 있다. 마포새빛문화숲(14쪽)을 찾은 건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한창 뜨거운 볕이 바닥을 달구던 여름이었다. 한강과 홍대 사이,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 발전소를 모토로 계획된 공원은 1930년 건설된 한국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있던 곳이다. 상수역에서 나와 걸으면 멀리서부터 복잡해 보이는 발전 시설과 높은 철책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버려진 공장을 되살린 뒤스부르크-노르트 공원과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테이트 모던을 생각하니 심장이 동동 뛰었다.

1단계 부지만 완성된 터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잔디광장을 뺀 다른 곳은 지형이 역동적이라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며 숨을 헐떡여야 했다. 이마에 난 땀을 훔치며 이만하면 볼 만큼 봤으니 돌아갈까 할 즈음이면 노란 크레인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개비온이 나무 뒤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좀 쉬었다가 둘러보면 될 걸, 그날의 나는 알 수 없이 초조해 쉼 없이 공원을 돌았다.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결국 절여진 배추처럼 축 늘어져 그늘진 곳으로 들어섰는데, 웬걸 거기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한강의 풍경이 있었다. 두어 개의 도로가 직선으로 흐르고, 뒤편으로 너른 면이 된 강이 어물거리고 있었다. 눈높이에서 차도가 지나고, 그 아래로는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는 이를 위한 또 다른 다리가 있다. 시선을 아래로 당기면 잠깐 강이 나타났다가 곧장 버려진 파이프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시설의 조각들이 등장하고, 이어 비탈을 따라 웃자란 식물이, 땅을 딛고 선 내 두 발이 보인다. 자동차와 자전거와 사람이 각기 다른 빠르기로 달리고, 잔잔한 한강은 그와 상관없이 느긋하게 제 속도를 유지하고, 산업 시설의 잔해는 천천히 낡아가고, 그 사이를 막 자라나는 식물들이 채운다. 시간의 층위, 그런 상투적인 표현을 눈으로 확인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흔히 숲을 가까이 둔 아파트가 그 녹지를

앞마당이라고 홍보하니,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한강도 마포새빛문화숲의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풍경을 공원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 이야기해도 될까. 고민하다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면 맞는 거지 뭐 하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공원을 빠져나올 때 지하에 발전 시설을 품고 있다는 잔디마당 위에 가만히 서보았다.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지지 않을까 잠깐 기대했는데 잠잠했다. 아쉽지는 않았다.

이제 밤에도 늘 빛나던 발전소의 불빛은 없지만 산책과 운동, 작은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이곳을 밝힐 것이다. 지면을 편집하며 마포새빛문화숲의 야경에 오래전 맛본 찰나의 ‘별빛이 내린 언덕’을 겹쳐보았다. 대학에 입학해 한동안 잊고 살았던 필적 확인 문구를 동생이 수험생이 된 해에야 다시 만났다. 동생이 만난 문구는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황동규, ‘즐거운 편지’). 갑자기 날씨가 추워질 무렵이면, 그때의 작은 위로를 회상해본다. 2021학년도의 필적 확인 문구를 소개하며 글을 닫는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나태주, ‘들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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