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을 잡은 손이 초벌된 항아리에 선을 긋기 시작한다. 흰 선이 한 줄 한 줄 채워지며 검은 항아리는 백자가 되어간다. 도예가 주세균은 분필이라는 일상적 소재로 한국적 아름다움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달항아리를 모방한다. 유약 대신 분필 가루가 덮인 도자, 낙서처럼 구불구불한 선이 그려진 도자는 낯선 모습으로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난 4월 1일, 우란문화재단은 백색에 투영된 다양한 이념과 심상을 공유하는 ‘화이트 랩소디(White Rhapsody)’ 전을 열었다. 백색은 한국의 전통성과 민족성을 대변하는 색채지만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그 함의와 소비되는 방식이 다양하게 변해 왔다. 전시는 백색을 통해 드러나는 전통의 시각성과 해석의 전형성을 현대적 시점에서 비평적으로 고찰한다.
백색에 관한 낯익은, 낯익지 않은 시선
전시장 입구에는 사전 리서치 자료와 직물, 비누, 설탕, 밀가루 등 백색 사물을 전시한 아카이브가 마련됐다. 사전 리서치는 산업, 문학, 건축 다양한 분야에서 쓰인 백색을 두루 살폈다. 이정은의 ‘화이트 인사이드(White Inside)’는 하얀 피부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최호랑의 ‘올림픽 시공간의 백색’은 88올림픽 개최 시점에 나타난 백색의 상징성을 탐구했다. 이야호는 리서치 픽션 ‘모두의 일’을 통해 흰색이 증발해버린 세상을 그렸다. 이 같은 작업은 역사와 인식 속 백색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며 이와는 또 다른 해석이 펼쳐질 것을 암시한다.
전시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다섯 명의 작가를 초대했다. 사진, 조각, 도자, 설치, 향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은 백색에 대한 작가들의 개별적 해석의 결과물로,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관념으로부터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전시의 협력 기획자인 조주리 큐레이터는 백색에 관해 “새로운 발언을 할 수 있는 세대의 작가들을 초청했다”고 설명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5호(2020년 5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