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변해가는 도시
우리는 유럽의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면 부러워하곤 한다. 유럽의 도시는 옛 멋을 간직하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삶의 이야기를 덧입혀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건축가 유현준은 역사가 깊은 도시들은 마치 여러 장의 트레이싱지 그림이 쌓여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1역사가 깊은 도시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상호 관계를 조절하며 누적된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 깊은 멋을 더한다. 삶의 흔적을 시대에 맞게 쌓아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우리 도시는 어떨까. 대한민국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도시에 담긴 이야기와 의미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평범한 일상이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되고 그 이야기가 쌓여 특별한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며 사는 듯하다. 흔히 한국의 도시가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에 비해 건축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이유를 오래된 건축물이 없어서라고 설명한다. 서울은 5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오랜 시간을 거쳐 수많은 트레이싱지에 시대의 켜를 남기며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온,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 숨 쉬던 역사 도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를 부정하듯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담긴 고즈넉한 골목길을 송두리째 없애며 개발하고 있다.
골목은 ‘땅에 새겨진 문양’이라는 의미의 지문(地紋) 혹은 ‘땅의 이야기’라는 뜻의 지문(地文)이라고 했다.2 건축가 승효상의 이 말처럼, 골목은 우리 윗세대가 긴 세월 삶을 가꿔온 터전이 있는 곳을 의미하지, 그 땅을 갈아엎은 뒤 새로 지어 올려 장소성이 해체된 아파트 단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시계획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오래된 건물의 경제적 가치는 시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하다”며, “활기 있는 도시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흐르는 세월 속에서 유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3 오래된 공간의 잠재력은 사회·역사적 맥락뿐 아니라 소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기능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공간 속에 새겨진 수많은 시간의 이야기들이 모여 도시의 다양한 지층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거창한 물음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네, 부모 혹은 조부모가 살았던 동네, 아니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도시 공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의 켜를 흔적도 없이 파괴하고 또 새로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삶의 흔적
몇 년 전 동네 연구를 하던 중 만난 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재개발이 추진되던 그 동네는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오래된 마을이었다. 주민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며 할머니의 일상을 몇 주간 함께하며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는 다세대 빌라에 살고 있었고, 그 빌라가 작은 마당 딸린 주택일 때부터 40년 넘게 같은 터에 거주해온 지역 원주민이었다. 시골에서 시집와 처음 살게 된 서울 집에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자식 셋을 모두 공부시켜 출가시켰다는 자부심이 컸다. 집 앞 골목 한 귀퉁이의 한 평 남짓한 땅에 상추와 깻잎 농사를 지어 이웃과 나눠 먹는 것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었다. 그런데 살아온 집과 동네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과 달리 할머니는 재개발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의문이 든 나는 며칠간 할머니의 일상을 관찰하며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4호(2020년 4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을유문화사, 2015, p.146.
2. 승효상, 『지문: 땅 위에 새겨진 자연과 삶의 기록들』, 열화당, 2009, p.79.
3. 제인 제이콥스, 유강은 역,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2010, p.272.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생활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 한국인의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SOM 뉴욕 지사, HLW 한국 지사, GS건설, 한옥문화원,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 한국인의 참다운 주거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 ‘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