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따릉이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건 계절 변화를 보여주고… 웨딩 촬영하는 사진은 없나?” 마감을 나흘 앞둔 밤, 편집부는 하나의 모니터 앞에 모여 유청오 작가가 보낸 서울숲 사진을 꼼꼼히 살펴봤다. 백여 장의 사진 중 ‘아카이브(archive)’로 의미가 있을 만한 사진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카이브라 생각하니 사진 속 풍경과 사람들의 행동이 새삼스레 다 의미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달 공원 아카이브 특집에 함께한 최혜영 교수(성균관대학교)는 “도시공원을 ‘이야깃거리’ 즉 ‘문화 콘텐츠’로 바라보지 않는, 공원 문화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꼬집었다. 조경학과 학생으로 4년, 조경 전문지 기자로 3년. 돌아보면 내게 공원은 누군가 설계한 공간, 주로 설명하고 분석할 대상에 가까웠다. 공원을 기억하고 기록할 대상으로, 이야깃거리로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말하는 특집 지면을 살피다 박완서 작가를 떠올렸다. 그가 일상을 주조하는 방식 때문이다. 보통의 소재를 재료 삼아 쉽고 흔한 표현으로 우려낸 진한 일상의 맛!『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그 맛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짧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 책은 1970년대 도시의 생활 공간을 배경으로 당시 사람들의 연애관, 결혼 생활, 자식을 향한 바람, 내 집 마련에 대한 열망, 이웃 간 사소한 다툼을 담은 48편의 콩트로 구성된다. 작가는 보편적 삶 이면의 내밀한 감정, 유희나 슬픔, 풍자적 요소를 가감 없이 들춰내 보인다. 1970년대는 경제 성장으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에 따른 심리적 빈곤을 경험한 시대다. 작가는 이러한 시대의 일면을 예리하면서도 거침없는 문장으로 풀어낸다.
‘마른 꽃잎의 추억’은 엄마 혹은 주부라는 이름으로 삶이 일반화돼버린 중년 여성의 감정적 일탈을 그린다. ‘나’는 남편 몰래 시집에 처녀 시절 구혼한 남자들이 준 꽃을 눌러 간직하고 있다. “그 총각들 중에서 지금의 남편을 선택해서 풍파 없이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 그러나 그때 달리 선택할 수 있었던 대여섯 갈래의 다른 삶에 대한 호기심까지 없는 건 아니다.”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남편도 출근시킨 오후, 불쑥 찾아온 공허함과 무료함은 익살스러운 불평을 낳는다. “우리 동네 집들은 모두 집 장사꾼이 지은 집인데 작을뿐더러 너무 편리하다. … 반드시 편리한 집이 좋은 집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밥 잘 먹고 건강한 여자가 잔걸음 좀 치면 어때서 꼭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는 식의 편리한 집에서 살 건 또 뭔가.” 그때나 지금이나 평범한 사람이 착실하게 돈을 모아 강남에 땅을 사는 일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완성된 그림’의 문규는 결혼 후 알뜰살뜰 모은 오십만 원을 들고 영동 땅을 밟는다. 하지만 백평 정도의 땅을 사려면 백만 원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2년 뒤 백만 원을 만들어 다시 찾은 영동에는 귀부인 차림의 여자들이 몇백 몇천 평의 땅을 흥정하고 있다. 몇 년을 더 투자해 천만 원까지 모아 보지만, 그 사이 허허벌판이던 영동 땅은 “몰라보게 발전해 넓고 기름진 도로가 사면팔방으로 뻗”어 있고 “으리으리한 호화 주택이 들어선 새로운 마을”이 되어 천만 원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는 “뒤늦게 영동 땅을 포기하고 잠실로, 수유리로, 불광동으로, 화곡동으로 쏘다”니지만 “어디든지 살 만한 땅은 귀부인들이 한발 앞서 차지하고 ‘용용 죽겠지’하는 식으로 그와 그의 천만 원을 얕잡는”다.
책머리에서 박완서 작가는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으로 내고 바깥 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콩트를 썼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이웃과 자신의 내면을 아주 세심히 살폈을 것이다. 꾸밈없는 솔직한 이야기에 막연하고 어렴풋하던 한 시대가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야깃거리로서의 공원을 마주하는 일은 어떻게 시작돼야 할까. 공원에서 겪은 사소하고 평범한 일을 꼼꼼히 들춰보는 데서 일 것이다. 내게 공원은 꽤나 사적인 공간이다. 중학교 때 체육 수행 평가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밤 늦게까지 놀던 곳이고, 작심삼일 다이어트 도전의 장이었으며, 친구랑 크게 싸우고 엄마 눈을 피해 맘 편히 운 곳이기도 하다. 한강공원에서는 치킨을 시켜 먹으며 대학생 된 기분을 만끽했고,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따릉이 어플이 실행되지 않아 분통 터질 뻔한 적도 있다. 올 봄 미세 먼지가 없는 날에는 근래 발길이 뜸했던 동네 공원을 찾아야겠다. 잔디 위에 돗자리 펴놓고 앉아 있다 보면 의외의 기억을 떠올리거나 재밌는 발견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귀여운 강아지라도. 하다못해 햇볕 아래 꿀 같은 낮잠이라도 잘 수 있겠지.
각주 1. 박완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 작가정신,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