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다음 학기 서양조경사 강의계획서를 올리라는 연락이 왔다. 작년 파일을 열어 날짜를 수정하고, 교재와 참고 문헌에 업데이트할 사항을 확인한다. 매번 하는 일이지만 주 교재를 고르는 일이 항상 고민이다. ‘교과서’ 한 권으로 게으른 수업을 하면 편하련만, 성에 차는 한국어 책이 없기 때문이다.1 영문 교재를 쓰자니 학생들 반응이 신경 쓰인다. 강의 평가 점수에 다음 학기 강의 개설 여부가 달린 시간 강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가뜩이나 학습량 많다는 원망을 듣는 마당에.
영미권에서 출판되고 주요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출판 연도순으로 참고 문헌 목록에 넣는다. 제프리 젤리코(Geoffrey Jellicoe)와 수잔 젤리코(Susan Jellicoe)의 『경관 변천사(The Landscape of Man)』(1964)2와 노먼 뉴턴(Norman Newton)의 『디자인 온 더 랜드(Design on the Land)』(1971)가 상단에 있다. 이 두 책 사이에 이안 맥하그(Ian McHarg)의 『디자인 위드 네이처(Design with Nature)』(1969)가 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이어 몇십 년의 공백기가 있고 1990년 즈음부터 조경사, 엄밀하게는 정원의 역사를 다룬 책들이 연이어 나온다. 1980년대 말의 이른바 ‘정원의 부활’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조경 이론서의 계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체계적인 논의와 방법론을 기준으로 보면 정원 이론서는 17세기~18세기 초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이어 정원의 역사를 비중 있게 다루거나 정원의 역사만을 다룬 이론서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유럽에서 나왔고, 오늘날 대부분의 서양조경사 책의 구성과 내용은 이를 바탕으로 한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2호(2020년 2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한국어로 된 대표적인 서양조경사 교재로는 다음이 있다. 정영선, 『서양조경사』, 누리에, 1979(절판); 한국조경학회, 『서양조경사』, 문운당, 2005. 40년이 넘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두 책의 구성과 (1950년대까지 다룬) 시간적 범위는 유사하다. 후자의 경우 여러 번 개정했음에도 20세기 후반 조경의 다양한 양상 및 동시대 현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복수의 저자가 다루는 내용의 양과 깊이가 천차만별이라는 점, 외래어 표기 오류가 다수 있다는 게 아쉽다.
2. 번역서로는 나상기의 번역본(기문당, 1982)과 누리에 편집부의 번역본(누리에, 1996)이 있으나 모두 절판됐다.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 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