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에요. 한 학생이 말한다. 기초 디자인 수업 시간,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하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사진만 넘겨보길래 네 아이디어는 무엇이냐 물으니 돌아온 대답이다. 요새 직장에 1990년대생 신입 사원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이전 세대와 다르다고 규정하고, 하나의 사회 현상처럼 다루고 있다. 직장에 1990년대생이 왔다면, 강의실에는 2000년대생이 앉아 있다. 핀터레스트와 유튜브의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을 스스럼없이 넘겨보며 창조를 위해 모방을 하는 풍경이 처음엔 낯설었다. 돌이켜보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은 내 학창시절에도 썼던 말이다. 나는 1983년에 태어나 재수로 입학한 03학번이다. ‘즐’과 ‘뷁’이라는 말이 유행한 그 시절에도 창조의 어머니는 모방이었다. 유명한 디자이너의 패널 이미지를 외장 하드에 간직하거나 도서관의 최신 국내외 잡지와 작품집을 뒤적이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부지런히 이미지를 소비했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사례 조사라는 단계에는 창조 이전의 모방이라는 메커니즘이 은밀히 스며들어 있다.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은 없다. 그렇다고 모방이 표절과 동의어는 아니다. 이전의 것들을 보고 배우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모바일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요새 친구들은 원하기만 하면 수많은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누구나 좋은 작품의 이미지를 맘껏 소비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으니 이미지 소비의 평등이 이루어진 셈이다.
사라지는 손 드로잉
달라진 풍경이 또 있다면 손 드로잉 수업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내 학창 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현상이다. 조경 소묘와 조경 구성 수업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그려본 손 드로잉은 트레이싱지에 끄적인 다이어그램과 기사 실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그린 사례 도면이 전부다.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활용이 격려되면서 손 드로잉 수업은 더 축소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 조경학과는 이공계열에 설치된 경우가 빈번해 나 같은 이과 출신이 손 드로잉에 익숙해지는 건 어렵고 컴퓨터 시대에 적합하지도 않다고 여겨진다. 손 드로잉이 조경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꼭 사라져야 하는지 의구심도 생긴다. 손과 컴퓨터는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시각화 테크놀로지일 뿐 그것을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환경과조경』 2019년 7월호 참조). 조경가는 화가나 그래픽 기술자가 아니라 경관 디자이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0호(2019년 12월호) 수록본 일부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 비평과 교육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 설계 실무와 교육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방법, 조경 아카이브 구축, 조경 디자인과 드로잉 교육,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원광대학교 디자인학부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중국 허베이 지질대학(河北地.大.) 환경디자인학과에 파견되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오픈스페이스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