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리중웨이 Lab D+H 공동대표
지난 6월, 『환경과조경』은 다국적 문화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조경설계사무소 랩디에이치Lab D+H를 소개했다. 랩디에이치의 상하이 오피스를 이끄는 리중웨이Li (Zhongwei)는 다양한 규모의 오픈스페이스와 상업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도시 본래의 색채를 보존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변화를 일으키는 도시재생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문화유산과 생태를 존중하며 친환경적 프로젝트를 실천해 온 유쿵졘(Yu Kongjian)은 흥미로운 인터뷰이가 아닐 수 없었다. 10월 중순, 리중웨이는 유쿵졘의 강연이 열리는 베이징을 방문했다. 강연 전 두 시간, 강연이 끝난 뒤에도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유쿵졘의 유년 시절부터 스펀지 시티(sponge city)에 이르기까지, 몇십 년의 세월을 종횡무진한 그날의 대화를 지면에 옮긴다. _ 편집자 주
땅을 이해하는 방법, 땅을 존중하는 철학
리중웨이(이하 리)어릴 적의 경험은 디자이너의 철학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하다.
유쿵졘(이하 유) 저장(Zhejiang) 성의 한 농촌에서 자랐다. 굉장한 산골이라 시내에 나가는 일이 쉽지 않던 곳이었다. 어릴 적 그곳에서 7년 정도 소를 몰았다. 덕분에 논밭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피게 되었고 어디에 수초가 많은지, 어디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지, 어디에 큰 나무가 있는지를 다 꿰고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에도 훤했다. 예를 들면 태평천국太平天國(1851~1864,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농민 봉기) 때 사람들이 몸을 숨겼던 동굴, 중국 전설 속 백사白蛇가 스쳐간 녹나무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 번은 홍수로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에 떠내려 갈 뻔한 적이 있다. 강변의 갈대를 부여잡아 겨우 살아남았는데, 그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자연과 더불어 산다면 홍수와 같은 재난도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당시 강변에 콘크리트 제방이 세워져 있었다면 나는 범람한 강물에 휩쓸려 갔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삶터는 하늘과 땅, 사람, 신이 공존하는 곳이라 믿어왔다. 아버지가 부지런히 일하던 모습도 선명하다. 기억 속 아버지는 평지, 경사지, 척박한 토양 등 어떤 땅에서도 작물을 재배해냈다. 자연과 어울리던 아버지의 방식이 내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리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유년을 보낸 것 같다. 이러한 경험이 당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당신은 중국 조경 분야의 첫 번째 유학 세대이며, 많은 조경가의 롤모델이다. 무엇이 당신을 해외로 향하게 했으며, 무엇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는가.
유 베이징 임업대학교(Beijing Forestry University)에서 석사를 마치고 학교에 남아 교수로 일했다.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된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들, 경관과 생태에 관련된 각종 원서와 이안 맥하그의 『디자인 위드 네이처(Design with Nature)』 등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리처드 포먼(Richard T. T. Forman)의 『경관 및 지역 생태학(The Ecology of Landscapes and Regions)』을 중국어로 번역해 강좌를 열기도 했다. 운이 따라주어 여러 조경가뿐 아니라 천촨캉陳傳康 등 지리학의 대가와도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해외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스웨덴 스톡홀름을 거쳐 미국으로 갔고, 마지막으로 하버드 GSD에서 공부했다. 유학을 마치고 중국을 살펴보니 바뀌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아 보였다. 그중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천하흥망天下興亡 필부유책匹夫有責이라는 말처럼 나라의 흥망성쇠는 한 명의 백성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중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9호(2019년 11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