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장에 서는 것을 기피한다. 체질적으로 광장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내게 광장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광장은 크고 작은 행위를 담아내는 무대이며 동시에 객석을 포함하는 극장이다. 그럴 때 광장은 존재 의의를 찾는다. 그 안에는 여러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어울리기로는 광대가 대표적이다. 더욱이 크라운(crown)을 머리에 얹은 광대가 있으면 광장은 더욱 빛난다.
광대와 광장이라니. 나는 지금 언어의 유희로 광장을 모독하려 든다. 오늘날 우리에게 광장은 진정성의 기표다. 민주 공화국임을 상징하는 신성한 곳이다. 더 이상의 신성 모독은 죄악이다. 고로 광장을 거부하는 것은 죄악이다. 나는 죄인이다. 광장의 시작은 한 인간의 작은 신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이 광장의 시작점이라는 생각을 갖지는 못한다. 하나둘 신체들이 접촉하면서 만들어지는 물리적 광장 이전의 세포cell들은 언젠간 완성형으로 만나게 될 광장이란 이름의 바디body가 얼마나 위대한 장소가 되어 자신들을 선동하는 장치가 될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 정치가 대부분은 위대한 광장의 빛나는 광대임을 자임한다. 광장에서의 소통이 민주 사회의 역군임을 보증받는 일이기에 그곳에서는 정치적 노선의 다름을 불문하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광대의 옷을 몸에 걸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광장은 로마 시대 권력자들이 발가벗고 정치하던 대목욕탕과 같이 입바른 소리와 몸에 맞지 않는 위선의 행동으로 빨갛게 노랗게 파랗게 물들여졌다가 이내 썰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텅빈다. 그래서 광장은 주조색이 없다. 그때그때 물들여지고 이내 지워짐을 반복한다. 광대가 아무리 많아도 광장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다.
광대의 진정성은 말하기를 멈추고 몸짓으로 말을 전한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광장에서 만난 수없이 많은 인파의 손에 들린 촛불과 팻말과 태극기는 각자가 시위하는 이유를 담아냄으로써 광대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것이 구호에서 몸싸움으로 번지면서 어느덧 광장은 광대의 손을 떠나 전투사들의 격전이 벌어지는 투기장으로 변한다. 누구도 이러한 광장에서 진정성을 찾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축제의 광장 이면에는 늘상 일그러진 풍경의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전진삼은 종합 예술지 『공간』 편집장, 건축 정론지를 표방한 『건축인 포아(POAR)』 창간인 겸 초대 편집인 주간을 거쳐 현재 격월간 『와이드AR』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건축 비평서 『건축의 발견』, 『건축의 불꽃』, 『조리개 속의 도시, 인천』, 『건축의 마사지』 등을 썼고,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반대하는 건축과 미술, 고고학 전문가들의 생각을 모은 『건축은 없다?』, 『건축인 30대의 꿈』,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 등 30여 책의 공저자로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