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
서울이 이제는 세계적인 문화의 도시라고 내세워도, 다른 나라에서 서울을 배워 갈 정도로 우리의 역량이 커졌다고 자찬을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선진국의 멋진 사례를 동경했고 갖고 싶었다. 우리의 현실에 맞게 제대로 소화하기도 전에 외국의 사례들이 우리 도시의 정책이 되었다.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도 그런 복제품 중 하나다. 그런데 6년 뒤 한때 많은 매체의 주목을 받았던 원래의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고, 그 취지는 유일하게 서울에서만 살아남았다. 정책적 카피로 출발한 프로그램은 원래 기획의 맥을 잇는데 그치지 않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원본을 뛰어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한다. 이제 이 기묘한 기획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맥락에 최적화된 형태로 진화하여 매년 도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실현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72시간 어반 액션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이하 72시간 프로젝트)의 모태는 ‘72시간 어반 액션(72 Hour Urban Action)’(이하 72 HUA)이라는 이벤트다. 72 HUA는 2010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Tel-Aviv 인근의 소도시 바트얌에서 열린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비엔날레(Bat-Yam International Biennale of Landscape Urbanism)의 한 행사로 처음 실행된다. 시장은 비엔날레를 계기로 도시가 자유로운 아이디어의 실험실이 되기를 원했고, 두 명의 젊은 건축가가 특이한 형태의 공모전을 제시한다. 주어진 시간은 72시간, 3일 밤과 낮. 참가자들은 한정된 기간 안에 한정된 예산으로 도시의 공간을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제시할 뿐 아니라 프로젝트를 실제로 만들어야 했다. 주어진 예산은 2000유로에 불과했고 모든 법적 제약과 인허가 절차를 피하기 위해 30cm 이상의 지반 공사도 불가능했다. 과연 누가 참여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열악한 조건의 프로젝트에 전 세계 40개국에서 450개의 지원서가 제출되었다. 기획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이었다.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지역 주민과 협력해 도시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과정은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72 HUA는 극한의 조건을 둔 일종의 건축적 게임이자 도시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이 이벤트는 흥미진진한 게임과 실험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72 HUA의 제안자인 케름 할브레트(Kerem Halbrecht)와 길리 카예브스키(Gilly Karjevsky)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1“대개 도시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돈, 행정적 절차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생각과 의지로 무엇인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오늘날 도시를 변화시키는 일은 전문가와 행정가, 정치가 등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되어 버렸다. 72 HUA는 이러한 불가능성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시민이 스스로 일상의 공간에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한다. 과연 누가 공공의 공간에 개입할 권리를 갖는가? 삶의 질을 결정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당연한 권리를 금지된 것으로 만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 기획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이 순간, 여기에서 활동가가 되고 반란군이 되라고 요구한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선언만이 존재한다. ‘내가 살고자 하는 현실을 내가 만들 권리가 있고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마지막 아방가르드라고 불렸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alist International)의 실천적 저항 정신을 계승하며,2건축의 권위를 건축 스스로가 부정하고 제도적 테두리를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건축에 저항하여 가장 낮은 위치에서 건축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시게루 반(Shigeru Ban)3의 생각과 맥락을 같이하며, 대학살, 전쟁, 재난과 같은 인간성 자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건축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아키텍처 포휴머니티(Architecture for Humanity)4와 공동의 전선을 펼치는 듯 보인다. 그러나 72 HUA가 이러한 움직임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지점은 놀이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놀이는 정치적 투쟁의 심각함을 거부한다.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한다. 72 HUA은 거시적 담론이 힘을 잃은 지금의 시대에 실천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가벼워야 한다는 점을, 그리고 일상의 리듬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큰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2년 뒤, 201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두 번째 72 HUA가 열린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참가자가 지원해 도시 곳곳을 72 HUA의 상징색인 주황색으로 물들였고 SNS와 유튜브를 통해 첫 이벤트를 뛰어넘는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가 지나기도 전에 세 번째 72 HUA가 이탈리아 테르니Terni에서 열린다. 2013년의 네 번째 72 HUA는 덴마크의 로스킬레(Roskilde)에서 열린다. 국제 음악 페스티벌과 연계한 이 행사는 예년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되는 팀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4년 독일 비텐(Witten)에서 열린 다섯 번째 행사를 마지막으로 72 HUA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중략)...
**각주 정리
1. 도무스(Domus)의 인터뷰를 참조했다(https://www.domusweb.it/en/architecture/2011/07/27/72-hour-urban-action.html).
2.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지식인이 모여 활동한 그룹으로, 전통적인 마르크시즘에 반기를 든 반자본주의적 사회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스펙터클의 정치에 반대하여 일상의 삶과 대상에서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으며, 문학, 시각 예술, 건축 도시 분야의 이론과 접목된다.
3. 시게루 반은 일본의 건축가로 2014년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 수상자다. 종이를 건축 소재로 실험적으로 사용하여 주목 받았으며, 종이 같은 값싼 재료를 재난 상황에서의 건축에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지속적으로 재난 상황에서 건축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실제 고베, 쓰촨, 동일본, 네팔 대지진 당시 임시 구조물을 현장에서 설계하여 제공했다.
4. 아키텍처 포 휴머니티는 재난, 전쟁 등의 극한 상황에서 건축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결성된 비영리 단체로, 자급자족적이고 협력적인 가치를 제시하며 전 세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여 왔다.
* 환경과조경 365호(2018년 9월호) 수록본 일부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했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으며, 설계 방법론을 다룬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를 썼다. 『용산공원』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