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술에 관한 기억이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발을 들이키던 시큼털털한 상투적 레퍼토리, 언젠가부터 속속 생기기 시작한 와인바에 여친을 데려갔다가 높은 가격에 놀란 자존심을 지켜 주었던 고마운 칠레산 와인, 할아버지 묘소 잔디 위에 뿌려 주고 마시지도 않았던 제례주, 동네 성당의 신부님이 맛보라며 권해 주신 달달한 국산 포도주 마주앙 등 주량이 매우 적은 나에게도 술과 얽힌 인연은 지겨울 만큼 많다.
술은 억지로 마셔야 하는 것 혹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등식은 다행히 사양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점점 사그라들었지만, 잔뜩 취해야만 하는 우리 문화만 탓했지 우리 술의 단조로운 시시함이 그 원인일 거라는 의심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스물다섯 즈음이었나, 일본 구마모토에서 그들이 소주라며 내온 술을 마신 그날 밤은 내 알코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후 외국에서 술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동안 술의 전부라고 알아왔던 소주와 맥주에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술은 당연히 수입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세상 좋은 술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고 꽤 고가의 술을 나누며 행복할 수 있어 좋지만, 그럼에도 여느 전시회 오픈식에 가서 으레 서빙되는 와인을 홀짝거리자면 뭔가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국산 와인을 접했다. 토종 농산물 오미자로 만든 술이었다. 왠지 소비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잔을 들긴 했지만 의외로 품질이 놀라웠다. 국산 와인 몇 가지에 대한 그리 탐탁지 않던 기억을 말끔히 밀어내는 멋진 경험이었다. 몇 달 후 전시회 오프닝 때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아 금방 동이 났다. 술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답해 주기 위해서 약간의 리서치를 한다는 게 그만 인터뷰로 이어졌다. ‘오미로제’가 만들어지는 문경은 경북 내륙의 첩첩산중이다. 고속 도로 개통으로 접근성이 훨씬 높아졌지만 소백산맥 언저리의 이 지역은 여전히 가 볼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 국토의 구석이다. 이종기 대표의 구상은 크고도 아름다웠다. 프랑스의 부르고뉴, 미국의 나파 밸리, 일본의 구마모토처럼 계곡마다 양조장들이 자리 잡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술을 빚는다면,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거친 술 문화를 바꿀 만큼의 세계적 명주가 생산된다면, 그건 단순히 풍경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저변을 개혁하는 의미 깊은 작업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5호(2018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와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