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벼락 뙤약볕, 독자 여러분은 이 여름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신지 궁금하다. 잠시나마 불볕더위를 피하며 일상의 도시 경험을 다채롭게 할 수 있는 장소로 이번 8월호에 소개하는 아모레퍼시픽 신사 옥을 권한다. 대기업 본사 건물이라고 미리 위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공항 못지않은 검색을 거쳐야 할 거라고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다. 반바지 입고 샌들 신었다고 주저할 이유도 없다.
4호선 신용산역에서 바로 연결되는 지하층에서 에스컬레이터 한번만 타면 외부인에게 개방된 이 건물의 넓고 높은 아트리움이 나온다. 특별한 정문 없이 사방의 가로 어디에서든 문만 열면 이 아트리 움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1층부터 3층까지 하나로 트인 공용 공간이다. 한강로 쪽 출구 옆 갤러리에 전시 중인 ‘아모레퍼시픽과 건축가들’에서는 이 건물의 설계자 데이비드 치퍼필드뿐만 아니라 그동안 아모레퍼시픽의 건축과 조경 프로젝트를 맡아 온 알바로 시자, 김종규, 정영선 등의 작업을 영상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 도록과 자료, 포스터가 2층 구조의 서가에 빼곡한 도서관 apLAP 에서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미술 아카이브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다. 유료이기는 하지만 지하층의 미술관 APMA 에서는 양질의 현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지금은 개관 기념으로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인터렉티브 작업이 전시되고 있다.
이 초대형 보이드 공간에서 꼭 교양 있는 문화인인 척해야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1층과 3층 사이의 아트리움은 일종의 광장이다. 다양한 색의 나일론을 엮어 만든 1층의 대형 벤치 ‘집착’(이광호 작)은 친구를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이미 자리 잡았다. 아모레 스토어를 구경하다가 2층과 3층에 널려 있는 세련된 디자인의 테이블과 의자(윤여범, 최형문 작)에서 마음껏 책을 보거나 졸아도 된다. 독서와 휴식에 지치면 고개를 들어 천장을 감상하면 된다. 아트리움의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5층 공중 정원의 연못 바닥이 겹쳐 빛과 물이 협연한다. 실내의 광장을 충분히 즐겼다면 건물 밖으로 나와 거대한 금속 원판과 얕은 연못이 서로를 비추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설치 작품 ‘오버디프닝overdeepening ’의 환영을 둘러보고, 키 큰 백합나무 100주가 심긴 야외 정원을 산책하면 된다. 이면 도로로 몇 걸음 옮기면 이른바 ‘용리단길’ 이다. 신사옥 입주 이후 ‘아모레 효과’에 힘입어 수십 년째 멈춰 있던 한강로2가와 용산 우체국 주변 골목이 변하고 있다. 여느 ‘뜨는 길’들이 그렇듯 하루가 다르게 ‘힙’한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민간 기업의 사옥이나 업무 공간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교류와 연대의 철학이 시도된 건축이다. 설계자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말하는 “직원뿐 아니라 지역 주민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소통과 유대의 건축” 은 듣기에만 그럴듯한 레토릭이 아니다.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서 초고층 거대 건축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속이 텅 빈 건축을, 개방형 공유 공간을 존중한 건축주의 철학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건물에 담긴 공공적 가치의 핵심은 마치 광장과도 같은 초대형 아트리움이지만, 더 큰 매력은또 다른 텅 빈 공간 세 곳에 있다. 5층, 11층, 17층에 과감하게 배치한 세 개의 공중 정원은 도시 건축의 백미다. 각각의 공중 정원에는 조경가 박승진의 단순하면서도 섬세하고 정갈하면서도 강한 디자인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본문에 싣는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조경 설계와 이명준 박사의 비평 에서 그 면모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박승진 소장이 그간 추구해 온 “콘텍스트와 패턴 사이”의 조경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세 개의 공중 정원이 숭고한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상상의 한계 그 이상으로 다가오는 도시의 풍광 때문이다. 5층 정원 에서 조감할 수 있는 용산 미군 기지의 풍경에 용산공원의 미래가 오버랩된다. 지난 이십 년간 그려온 여러 버전의 용산공원 계획안보다 훨씬 감동적 이다. 11층 정원에서 마주하는 용산과 한강 경관은 다큐멘터리보다 더 생생하게 도시 서울의 민낯과 속살을 보여준다. 북쪽으로 열린 17층 정원의 풍광은 글로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다. 남산이 왜 서울의 랜드마크인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아쉽게도, 우리는 이 공중 정원들에 오를 수 없다. 홍보팀의 협조와 안내를 받는 취재나 공식 행사가 아닌 이상, 전망대가 아니라 기업의 업무 공간이자 직원의 휴식 공간인 곳을 개방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환경과조경』 이름으로 취재차 방문했을 때 경험한 감동을 연구실 학생들과 함께 간 답사에서는 전달할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까웠다. 소통과 연대의 건축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자 한 아모레퍼시픽이라면, 조금 더 섬세한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요일의 특정한 시간대에 한해 제한적으로라도 공중 정원을 개방하면 어떨까. 아니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라도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