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간’과 ‘장소’ 구분하기
대학원에 진학한 후 맞았던 첫 3월, ‘공간’과 ‘장소’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라는 교수님의 주문에 한참 머뭇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둘에 대한 구분과 이해가 조금 뚜렷해 졌지만, 아직도 정답을 줄줄 외울 수는 없다. 다만 확연한 것은 공간은 물리적인 환경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장소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보태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설계수업시간에 도시 내에 장소들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과 늘 고민을 한다. 공간에서 장소로 전환하기 위한 ‘뭔가’를 찾는 일은 항상 해 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 결론을 내려 보자면 그 뭔가의 첫 번째는 ‘사람’이다. 물론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도 여러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장소에 직접 들어가서 장소를 만들어 가는데 힘을 보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장소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즐기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또 그 장소를 기억에 담아두고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장소는 사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하고 ‘별 볼일 없는 공간’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이 논리가 맞는다면 좋은 장소를 만들거나 찾는 일보다는 그 장소를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사람이 그 장소에 가장 적합할까?”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공간을 장소로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과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다.
흔하게 사용하는 ‘장소성’(場所性)이라는 말은 ‘성’(性)자가 붙어 속성을 나타내는 다른 말들과 달리 영어 표기가 ‘sense of place’다. 분명 깊은 이유가 있는 듯하다. 그 센스는 ‘장소가 가지는 자체의 감각’도 포함하지만 그 장소를 느끼고 그 장소에 뛰어드는 ‘사람의 지각’도 포함하는 것이다. 결국 좋은 장소를 가지는 일이나 공간을 장소로 바꾸는 것은 ‘사람하기 나름’인 셈이다.
2. 장소의 힘 : 도시에서의 역할
2.1 장소가 갖추어야 할 것들
도회지 사람들은 냉정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도시공간이 장소가 되길 기다려 주질 않는다. 좋은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일단 잡아야 한다. 잡힌 사람들이 조금씩 그곳에서 ‘긍정적 활동’을 시작하고, 이 활동이 누적되어 살을 보태면서 큰 활동으로 변하고 순환되어 결국 ‘제대로 된 도시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도시의 장소는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일단은 ‘물리적인 환경’은 있어야 한다. 실내든 실외든 또 양쪽에 걸쳐져 있든. 그런데 여기까지는 단지 공간일 뿐이다. 공간에서 장소로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시각은 물론, 사람의 오감에 의해 인지되는 소리, 냄새, 또 빛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런 것도 있다. 장소의 크기와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차원’(dimension)도 있고 ‘시간’도 있다. 차원이 일정한 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의 크기를 결정하여 준다면, 시간은 경험을 연속으로 일어나게 함으로서 누적되는 경험의 양을 조절해 준다.
뭐니 뭐니 해도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 숨어 있거나 스며있는 ‘에너지’다. 그 에너지를 느끼고 경험하는 일은 사람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다. 나는 새벽 동이 틀 무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즐긴다. 아무 방해 없이 비릿한 냄새와 함께 붉은 색을 더하며 변해가는 바다의 모습은 분명 그 순간 나만의 장소가 된다. 항구의 활기찬 새벽 (생선)시장은 멋진 장소로 돌변한다. 시장 곳곳에서는 바삐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어부와 상인들의 에너지들이 항구의 흔적으로 스며들면서 흥미로운 장소들이 만들어지고 또 동이 트면 이내 사라져간다.
2.2 장소가 도시에 주는 것들
부산에 살면서 가끔 서울에 갈 때마다 생긴 습관이 있다. 부산으로 돌아올 때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궁금해서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는 일이다. 인사동길, 청계천, 서울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내가 가장 즐기는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여행길이다. 운 좋은 날이면 곳곳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쌈지길에서 만나고, 광통교 아래 물가에서도 만나고, 청계천변 뒷골목에서도 만나고, 또 계절마다 변하는 서울광장의 잔디위에서도 만난다.
3. 장소 팔기의 최소 조건
요즘 떠도는 말 중에 ‘슈머마케팅’(sumer marketing)이라는 말이 있다. ‘sumer’는 소비자라는 ‘consumer’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이런 말도 있다. ‘크리슈머’(creative+consumer), ‘트라이슈머’(try+consumer), 심지어 주부들이 스스로 자신의 생활공간이나 제품에 대해 문제를 찾아 개선한다는 ‘마담슈머’라는 말도 있다. 모두 다 상품을 잘 팔기 위해 고객들의 긍정적인 참여와의 세밀한 접목을 의미하는 개념들이다.
도시의 상품은 ‘장소’다. 고객은 ‘지역민이고 방문객’이다. ‘장소마케팅’은 슈머마케팅과 똑 같은 이치다. 좋은 상품을 팔기 위해 고객에 초점을 둔 기업의 마케팅 전략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고객에 해당하는 사람에 의해 장소의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고, 장소라고 열심히 만든 곳이 도시의 흔하디 흔한 공간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방문객의 생각과 정서에 잘 맞아 떨어지며 엉뚱하게 보석 같은 장소가 되는 곳들도 있다.
4. 마치며
도시의 한 공간이 원래 그 자리에서 제 모습만 갖고 있다면 약간의 양념만 쳐도 좋은 장소로 바꿀 수 있다.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일에 앞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또 사라질 수 있는 도시의 (가능)장소들을 찾아 치유하고 지켜가는 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모든 이들이 열심히 외치고 있는 ‘문화의 시대’에 살면서, 모두가 찾고 염원하는 새로운 도시의 신(新)문화를 우리 동네 뒷골목에서도 우연히 만나고 싶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