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우리는 얼굴을 잃어버렸다. 남대문은 관료적 명칭인 「국보 제1호」이기 이전에 서울의 얼굴이었고 한국의 얼굴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얼굴이었다. 한국인의 공동체적 가치를 상징해오던 이러한 역사유적이 한낱 개인의 금전적 불만 표현의 수단으로 하루아침에 희생되는 광경을 전국민이 동시에 시청하면서 우리들은 공동체라는 것의 실재와 그 근거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미 우리 사회 속에 오래도록 진행되어 온 인문적 가치들의 와해와 방기, 천민자본주의로의 반성없는 이행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인 이벤트였을 따름이고 숭례문은 단지 그 희생양이었을 따름이다. 문제는 훨씬 이전부터도 숭례문은 성곽의 팔다리를 절단당한 채 주변의 고층빌딩들과 차량의 홍수 속에서 근대화에 피압당하는 전통문화의 모습을 365일 초라하게 생중계해 왔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상황은 또 하나의 서울의 얼굴인 남산의 경우에서도 다르지 않다.
저명한 도시학자 라퍼포트(A. Rapoport)는 우리의 환경 속에는 쉽게 변하는 부분과 그다지 쉽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 변하지 않는 부분이 환경의 ‘장소다움’인 정체성을 형성해준다고 하였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50년 이상이나 서로 보지 못하고 지내던 부모 형제들이 그 격세지간에 다시 만나 서로를 기억해 내는 것도 세월이 흐름에도 변치 않는 신체와 얼굴 중의 ‘쉽게 변하지 않는 부분’ 덕분일 것이다. 이들을 세대를 넘어 전해 내려온 유전자의 발현으로 보기도 한다. 세계의 도시환경들 속에서도 비교적 쉽게 변하는 부분은 실용적, 기능적 부분이고 쉽게 변하지 않는 부분은 자연지형이나 길의 구조와 같은 도시의 기본 틀과 관련된 부분들, 그리고 궁성이나 종교시설 등과 같이 사회체제의 항상성에 의해 유지되는 상징적 공간들이다. 이 마지막 부분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역사문화재들로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공공적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이제까지(?) 믿어왔던 유산들이다.
이들 역사문화재의 보호를 위한 정책은 일찍이 20세기 초부터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구미지역을 중심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역사적 유적 그 자체의 보호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 후 1, 2차세계 대전의 도시파괴와 그에 잇따른 근대도시로의 전환기에 이르러 역사유적들은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1960-1970년대를 전후로 하여서는 국제연합의 하부기구인 유네스코 주도로 관점을 더욱 확장시켜 세계 각국의 문화재 자체와 주변 경관을 함께 보호하려는 일련의 행동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궁극적 결과물이 「세계의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에 관한 협약」이었다. 각국은 이에 따라 협약가입과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받게되면서 문화유산 및 그 주변의 경관보존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제도와 정책을 전환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뒤늦게나마 1995년 이후 서울의 종묘와 창덕궁을 필두로 세계문화유산을 지정받기 시작하여 북한의 고구려고분군을 포함하여 총 8개의 단위장소와 지역들이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각 문화유산지구의 물리적, 시각적 보호를 위해 지구 주변에 광역의 완충지구를 지정, 관리하기를 권고하여 왔는데 이의 제도적 시행은 현재까지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종묘 앞 세운상가 철거와 함께 이루어지는 주변지구의 고밀도 재개발계획이 보고됨으로 해서 종묘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철회 압력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의 서울시청사 신축계획의 승인거부에 따른 신축계획 번복과 지연과 함께 이제 한국에서도 문화재와 그 주변의 경관관리는 문화재 관계부서만의 과제가 아닌 도시행정의 당면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글 _ 김 한 배 Kim, Han Bae(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