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여름, 광화문 앞 세종로 일대가 광장으로 변신한다. 조선 유생들의 항소가, 4.19혁명의 데모가, 87년의 피 끓는 민주 항쟁이, 군무와도 같은 월드컵의 응원이, 최근의 각종 촛불시위가 있었던 곳이다. 광장이 아니지만 광장의 역할을 했던 도로 공간, 이른바 “광장 없는 광장”이 이제 광화문광장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제대로 된 광장의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일상의 하늘과 만나는 광장
서울시가 민선 4기 5대 주요 프로젝트의 하나인 ‘도심재창조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여 2007년 12월 설계안을 확정한 광화문광장 조성 사업은 국가를 상징하는 가로축을 만들고 월대와 육조거리를 회복하여 역사문화공간을 창출하고 차량보다는 인간의 보행 위주 공간을 만들어 청계천 못지않은 관광명소로 세종로를 탈바꿈시킨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광화문광장이 가져다 줄 최고의 선물은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이 하늘을 가질 수 있게 된다―하늘을 보기 힘든 도시 서울, 이 서울의 한복판에서 마음껏 하늘을 경험한다는 것, 얼마나 기쁘고 멋있는 일인가. 16차선의 세종로가 광화문광장으로 바뀐다 해서 공간의 수직적 성격과 외양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북악산 쪽 경관 프레임에서 하늘의 면적이 별반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제는 두 발로 걷고 때로는 멈춰서거나 앉아서, ‘일상적으로’ 하늘을 볼 수 있게 된다. 단지 경복궁과 북악산 쪽의 경관이 시원해지는 차원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의 반은 땅이고 나머지 반은 하늘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땅에 살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땅만 본다. 땅은 생활은 물론 생존과도 직접 관계된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에게 부여된 또 다른 영토이다. 삶을 구속하는 땅을 벗어나 확장의 여유와 초월의 기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하늘을 보는 행위이다. 하늘은 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 보는 일과 가지는 일이 등식을 이룬다.
서울에서 하늘을 일상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좁은 골목으로 짜인 구시가지나 군사처럼 도열한 아파트촌이나 하늘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산이나 전망대에 올라 만나는 하늘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하늘이다. 초고층건물의 최상층에 거주하지 않는 한 서울 같은 도시에서 하늘과 여유롭게 만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전망이 좋다는 말은 하늘이 많이 보인다는 말과 거의 같은 뜻이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랜드스케이프(landscape)는 실은 랜드(land)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스카이(sky)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망은 어쩌면 “스카이스케이프(skyscape)”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전망이 좋고 조망이 뛰어난 아파트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비싼 이유는 결국 하늘을 '일상에서' 많이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광화문광장을 거닐며 서울의 대표적인 하늘을 눈높이에서 마음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만의 하늘을, 그 스카이스케이프를 보고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만나는 하늘은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땅 위의 일상이 하늘과 만나는 것이다. 광화문광장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배정한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